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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Mar 29. 2021

영화 '아주 오래전에'
를 만들고 나서

once upon a time

*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이 영화는 사실 제대로 완성될 줄 모르고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목도 아무렇게나 막 지었는데 영화제를 통해 관객들을 만날 기회들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아주 오래전에'라는 영화 제목이 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나름 적절한 제목이기는 한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라는 아주 짧은 5분짜리 실험 영화가 과거의 기억이나 트라우마에 대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에 생긴 안 좋은 기억들이 현재에 어떻게 다시 떠오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에서 빠져나오는지에 대한 시각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 영화는 결국 '자존감'에 대한 영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영화라기보단 현재에 대한, 미래에 대한 영화다. 내가 한 과거의 '기록'이 어떻게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서 자기 치유의 기능을 하는지, 어떻게 현재의 나를 구원하고 회복하게 하며 계속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다룬다. 


어떤 일에 대한 기분이 너무 복잡하거나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냥 생각나고 느끼는 대로 그것들을 일기로써 적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읽지 않을 오직 나를 위한 문장들이었으며 그래서 어쩌면 더 불완전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과 더 가깝고 지나친 생각의 회로를 거치지 않은, 진짜 그때의 나를 제대로 담은 것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자주 썼다. 고등학생 땐 잠시 쓰지 않았지만 20대가 되며 다시 종종 쓰기 시작했고, 2016년 봄부터 좀 더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손으로 쓴 것들은 워드로 쳐서 구글 드라이브에 제대로 모아놔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좀 귀찮아서 잠시 쉬기도 했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로울 땐 노트에 그렇게 적는 게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 '과정'은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는 어떤 '시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그 일기들을 자주 읽거나 찾아보거나 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쓰는 과정 자체가 일기라는 결과물보다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가끔 생각이 날 때나 그때 뭘 썼나 궁금해지면 찾아보곤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읽어보면 그때 쓴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때 썼던 것들에 더 이상 동의를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일기장에 쓴 문장들이 시간이 지나 현재의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읽히고 그게 어떤 위로나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기록의 힘을 다룬다. 그리고 이 기록의 힘이 자존감, 즉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스스로를 믿는 어떤 감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도 물론 필요하며, 때때로 나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때도 많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잘 달래고 나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고, 자기 치유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오래전에 내게 했던 말들, 썼던 것들 그 기록의 시간이 가진 힘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내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아주 개인적인 영화지만 일기를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 좋은 말을 해주는 건 어쩌면 더 쉽다. 내 스스로에게 그렇게 해주는 건 어렵다. 아주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젠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싶다. 우리 자신을 가장 제대로 알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니까. 



*이 영화는 작년 10월 체코의 이흘라바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했으며 다가오는 5월, 다른 두 영화제에서 온라인(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음)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줄거리: 인간의 흔적이 없는 어느 곳에 한 폭포가 있다. 급류의 빛나는 표면을 따라 단어들이 나타나고, 점점 중앙으로 다가간다. 테잎이 윙윙 돌기 시작한다. 노스텔지어는 끈질기다. 과거를 다시 방문하게 하는 뜻밖의 강요에 대한 에세이 필름. 영화는 나쁜 기억들을 따라가려는 '이상한 충동', 과거의 힘에 대한 '저항' 모두를 아우른다. 


영화는 예상치 못하게 과거의 기억들에 압도되는 순간을 그린다. 동시에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는지를 그리며, 기록이 어떻게 자기 치유의 기능을 하는지를 탐구한다. 단어들과 문장들은 파편적으로 끼어든다. 사운드는 끊임없이 몰려들다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이미지는 계속 이동한다.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경험이 있는 모두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싶다.]


영화에 대한 정보: https://jiyoonsfilm.com/Once-Upon-a-Time


글. 박지윤 


*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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