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박지윤 JiYoon Park Apr 17. 2022

장소를 아카이빙하다. 사라지지 않는 풍경들  

공간과 장소가 품은 것들

*해당 글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공간이나 장소의 역사를 기록한 작품은, 그곳에서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을 보여준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다음으로 내게 중요한 주제였다. 학부 때 미술사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자연스레 역사성과 아카이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한 장소가 품고 있는 시간의 층위를 기록하고, 그 장소가 인간을 포함한 여러 존재들과 어떤 관계성을 지니는지 관찰하는 작품들이 특히 흥미로웠다.


재작년 가을, 온라인으로 개최된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타버린, 불의 땅 Burnt. Land of Fire>(2020, 벤 도나테오)을 만났다. 대사도 거의 없이 적막한 사운드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을 담은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앉은 자리에서 다섯 번을 봤다. 젊은 사람들이 이탈리아 북쪽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그 마을에는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았다. 카메라는 그곳의 사람들, 건물들, 바닥에 누워있는 개 등 '남아있는 것'들의 시간을 초현실적으로 포착한다. 공간의 나이 듦,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이 듦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따듯하면서도, 영화 내내 맴도는 적막감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그 마을과 사람들이 곧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암시하기에 분명 쓸쓸하면서도, 그 장소가 품은 것들을 카메라로 재발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과 사람들은 하나의 사라지지 않는 풍경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영화 자체가 어떤 세월을 품고 있는 듯해서, 역사학자의 아카이빙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카이브와 기록, 공간의 역사성에 대해 질문하는 시네마라고 생각해 큰 스크린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은 작품이었다.

<타버린, 불의 땅 Burnt. Land of Fire>(2020, Ben Donateo)


언젠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에 들어갈 한 장면을 간단히 생각한 적이 있다. '몇 백 년 전 누군가 벽에 써 놓은 어떤 오래된 흔적을, 지나가던 한 아이가 발견한다. 지나가던 한 어른도 멈춰 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몇 백 년 전 누군가 남겨둔 그 오래된 흔적을 함께 바라보며 말을 걸고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러한 장면이 담긴 다큐멘터리 작업을 올해 안에 꼭 하려 한다. 2018년과 2019년에 짧은 실험 영화(Nameless Places)와 사진 작업(Out of Place)을 통해 장소성을 탐구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이 실험 영화와 사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소를 아카이빙 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가 될 예정이다.


작년에  영화  하나가 한국영상자료원의 독립영화 아카이브 구축 사업에 선정되었고,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구 보존될 예정이다. 작품이 영구 보존된다는 개념 자체를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훗날 내가 죽고  뒤에도  영화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영원히 보존된다는  신기했다. 사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 대해서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지만, 아카이브라는 것이 지닌 힘을 생각해   있었다.  영화를 포함 아카이빙  다른 영화들, 그리고  영화  사람들과 장소들이  세월을 살아남아 사라지지 않는 풍경이 된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위안을 주는  같았다.


2022년 4월

글. 박지윤


*해당 글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커버이미지 - <타버린, 불의 땅 Burnt. Land of Fire>(2020, Ben Donateo) )


 

이전 01화 존재하는, 되어가는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만들며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