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 해본 홈스테이

주방에 들어가지 말라니요?

by 샌프란 곽여사

2009년 7월 처음 미국에 도착한 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가족이나 친구들, 혹은 업체의 누군가가 마중 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단출한 짐가방 하나 들고 나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저 미국에서 살아내리라, 그 한 각오만으로 인천공항에서 하염없이 울며 손 흔드는 엄마를 보면서도 나는 ‘이제 혼자 살아야 해!’라는 굿센 다짐만 했었다.


군중 속을 홀로 걸어 나오면서 난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이제 어떻게 홈스테이 집에 도착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서울 종로유학원에서 소개해준 홈스테이 집의 주소는 잘 적어왔지만 거기까지 어떻게 가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몇 번의 설명을 듣고 보고 왔지만 내 머릿속은 새하얬다.


수첩을 보며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다가온 아주 젊은 청년 하나가 나에게 라이드를 제안했다. 나는 당시 29살 꽉 찬 나이였지만 미국에 관해 아는 게 없어서


‘내 돈 별로 없는데…’


라며 떠듬거리는 영어로 말했고 $30 가격으로 퉁치기로 하고 탔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 차는 정식 등록한 택시가 아니었고 개인차량으로 불법 택시 영업을 하는 차였다. 그 청년 또한 어리숙해서 내 목적지를 어찌 가는지 몰라 누구에게 연신 전화를 하며 어찌어찌 도착했다. 만약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면 한국에 있는 내 가족이 이 일을 알 수도, 경찰이 나를 찾기도 어려운 그런 위험한 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대로인 Gearly Blvd에서 1st Ave, 2nd Ave, 3rd Ave를 지나 모퉁이의 부산한 식재료 마트를 돌면 4th Ave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몇 번의 블록을 지나치면 샌프란의 자랑거리인 Golden Gate Park 가장자리가 보이는 그즈음에 내가 머물던 홈스테이 집이 있다.


그 불법 택시에서 내려보니 1층을 차고로 사용하는 그 집의 현관이 저 위에 보였다. 미국 생활이 그 계단의 높이만큼 멀게 보여 난 왈칵 두려워졌다. 하지만 한 계단, 한 계단 그저 오르는 일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벨을 눌렀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이 잠시 집을 비웠단다. 현관에 철퍼덕 앉았다. 곧 추워졌다.


7월의 샌프란시스코는 한국의 초겨울만큼 춥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축축하고 찬 공기가 얼음처럼 차갑고 기기 막히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서서히 몰려오는 무거운 안개는 그 안의 미세한 물방울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종로유학원의 그 아가씨는


‘샌프란은 일 년 내내 온화한 날씨라 그냥 얇은 남방 하나 챙겨가시면 돼요’


라고 말했지만 문제는, 그 아가씨가 Nevada주에서 1년 공부하다 온 경력이 다라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그 아가씨 머릿속에 여기의 여름에 얼마나 추운지 No Idea 였을 것이다.


근처 커피샾 취재차 다시 가 본 이 구역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내 기억도 하나도 녹슬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 거주지역

내가 묵은 집의 주인은 40대 초반으로 샌프란의 커뮤니티 컬리지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집의 1층 거실을 놀이방으로 만들어 근처의 미취학 아동들을 거두어 유치원을 하고 있었다. 아침 8시면 급한 엄마들의 벨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나를 비롯한 독일인 남학생, 여학생 이 세 명은 주방 출입이 금지됐다. 주방으로 가려면 거실을 통과해야 하므로 안전사고의 방지를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나는 커피 한 잔 못 마시고 조용히 집을 나서는 게 다반사였다. 이것저것 다 포함해 한 달 $1500을 지불하고 왔지만 나는 아침을 못 먹고 나가는 날이 많았다. 바쁜 주인은 첫날 저녁으로 남자 친구가 어디서 얻어온 식은 피자박스를 내놓았다. 토핑이 하나도 없는 아주 얇디얇은 그런 피자였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내 신세 같았다.


홈스테이라고 하면 집주인이 상냥하게 저녁을 차려주고 모두 둘러앉아 즐거운 대화를 하는, 그런 즐거운 생각을 하지만 홈스테이 집주인도 본인 생활이 있어 저녁은 급하게 데운 음식으로 때우거나 피자 한 조각 먹고 끝냈다. 미국에 살다 보니 매 번 저녁을 차려내는 것도 현실성이 없었구나, 이해를 했다. 하지만 밥과 반찬이 그득한 저녁을 먹다가 초라한, 손 가는 게 하나 없는 저녁을 먹다 보니 괴로움이 점점 커졌다.


어쩌다 그 독일인 학생들과 나 모두 앉아 저녁을 먹으며 홈스테이의 모범 같은 시간을 보낼라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 독일인 친구들은 떠듬거려도 영어를 거침없이 내뱉었지만 나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시절 4년을 틈틈이 공부했는데도 입이 풀을 바른 듯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저녁 먹는 내내 진땀을 흘리다가 내 방으로 도망치듯 올라와 누우면 긴장으로 머리가 지끈댈 정도였다. 일 년 내내 겨울처럼 춥지 않아 난방이 아예 없던 그 방에 누워 체온으로 침대를 덥히는 그 시간 동안 난 오들 오들 떨었다.


정확히 2주 뒤, 난 열쇠와 메모를 탁자 위에 남겨놓고 그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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