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 이야기 1-8
시아버님은 꿈이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 아들 세 명과 함께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꿈. 삼대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사는 꿈. ‘복닥거린다’고 말하지만, ‘거느린다’로 들리는 그런 말씀을 항상 하셨다.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하고야 마는 분이셨다. 거기에 더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꼬물꼬물 손자까지 더해졌으니, 더 이상 미룰 일은 아니었으리라. 좀 더 넓은 집터를 알아보셨고, 직접 설계에 들어가셨다. 이 층엔 시부모님이 사는 한 가구, 일 층엔 세 아들이 사는 세 가구가 있는 그런 집으로. 출산 준비와 산후 조리로 친정에 가 있던 두 달여 동안 공사가 마무리되도록 그렇게 만들어 내셨다. 몸조리가 끝난 나는 아버님이 만들어 놓은 화목할 왕국으로 들어갔다.
임신 중이었을 때 아버님을 따라가서 본, 돌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던 잔디로 둘러싸인 따뜻한 베이지색 단층집은, 아기를 놓고 따라가니 딱딱한 회색 대리석 이층집으로 변신해 있었다. 우리에게 배당된 일 층 한 곳의 문을 열었다. 분가 아닌 분가였다. 잠만 자는 우리 집이 생겼을 뿐이었지만, 새벽부터 이 층을 오르내려야 하는 생활이었지만, 괜찮았다. 그래도 좋았다. 아버님에 의한 어설픈 설계에 실용적이지 못한 공간이었지만 우리 집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배시시 미소가 흘러나왔고, 설레었다.
아기 몸엔 모유가 좋다는 말에 돌까지 모유를 먹였고, 천 기저귀가 좋다는 말에 일회용 기저귀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워킹맘도 아니었고, 갇혀있다시피 집에만 있는 나에겐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신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순간들이 행복했다. 시부모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며느리의 일이 아니라, 아기로 인해 보장되는 온전한 엄마의 일은 피곤함도 웃으며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내가 미처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손주를 생각하는 시부모님의 마음이었다.
나만큼이나 아기를 예뻐하는 이는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이셨다. 원체 누구보다 아기를 좋아하는 친정 아빠는 출근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자주 우리 집으로 들렀다. 함박웃음 지으며 들어와 아기를 안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가셨다. 나만의 공간에선 눈치 볼 것 없었다. 좋았다. 소소한 웃음이 흘러 다녔다.
아버님 또한 퇴근길이면 아기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셨다. 곁에 계신 시부모님 덕에 아기를 봐주실 때 다른 일을 할 수 있어 편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20분이 되고. 저녁 먹고 설거지하면 우리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들이 아기로 인해 시부모님과 머무르는 순간들로 늘어났다. “우리가 데리고 같이 잘 테니 넌 내려가서 편하게 자거라.” 이젠 아기와의 시간도 내 생각대로 계획할 수 없는 순간들로 늘어났다. 아버님의 마리오네트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이 다시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새아가. 돌잔치를 크게 벌일 건 없잖니. 그냥 집에서 간단한 식사 대접을 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괜찮겠지?”
여전히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 또한 뷔페에서 하고 싶다는 ‘건방진 말’은 할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은 아버님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했으니까. 내 눈엔 보였다. 아버님이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손자까지 삼대가 화목하게 사는 모습. 타인에게 보이는 완벽한 가족의 모습. 그것이 아버님에겐 만족스러운 행복이었고 꿈이었다.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란 놈은 쉴새 없이 숨통을 조여댔다. 아버님의 꿈을 채워나가는 데 보탬이 되는 것. 그것이 며느리인 나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에서 하는 돌잔치는 이사 온 지 1년이 되었지만, 집들이를 겸해서 하는 것과 같았다. 아버님 첫 손주의 돌잔치에 양가 친척과 지인들이 셀 수 없이 들이닥쳤다. 가족의 조언 속에 다행히 출장뷔페도 곁들어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돌잔치가 수월히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도떼기시장 같았다. 나와 어머님 말고, 다른 이가 부엌에서 같이 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 나서서 도와줬던 것 같다. 그게 아니고야 어머님과 나, 둘이서 치를 수 있는 손님들이 아니었으니까.
친정 부모님 옆에 앉을 시간도 없었고, 결혼 후 오랜만에 만나는 친정 친척들하고도 겨우 눈인사 한 번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이럴 것 같아서 친구들에겐 연락도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설거지하고 있자니 “새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앞치마에 젖은 손을 비비며 나가보니 돌잡이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같이 있어야지. 나오라 해.” 누군가 얘기하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덕분에 한쪽 곁에서 아기의 돌잡이를 바라보았다. 한복은 고사하고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도 아닌, 면티와 청바지를 입은 채 질끈 묶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당기며 돌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내 자식의 첫 생일날, 말랑한 자식 아이의 손을 처음 잡아 보았다.
돌잔치를 치르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손엔 사과 한 상자가 쥐어졌다. 현관 밖 마당 한쪽엔 사과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버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손님들은 문을 나섰다. 흡족해하는 아버님의 미소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아버님은 당신의 꿈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다.
“새아가” 아버님이 부를 때면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이번엔 뭘 해야 할까. 얼마만큼 해야 할까. 분명한 건. 뭐든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 이해되지 않고, 하기 싫은 내 마음은 당연히 꾹 눌러야 한다는 것.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말, 바로 그것이었다. 그럴수록 착한 며느리라는 칭찬은 따라다녔다.
나는 꿈이 없었다. 오로지 목표만이 존재했다. 착한 며느리. 원하던 목표를 이뤄가고 있었다. 만족해야 마땅한데, 눈물만이 늘어났다. 아버님의 꿈 뒤에 늘 서 있어야 했다. 눈물만큼이나 공허함이 커져만 갔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구태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착한 며느리 자리를 내쳐버릴 용기가 없었으니까. 무서웠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닦고. 깊은 한숨을 내뱉고. 아침이면 눈을 떴다. 생각하지 않고 살려는 습관이 내 삶을 갉아 먹었다. 아버님의 꿈. 그곳은 겁 많은 새아가의 절망으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