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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그러려니 May 14. 2023

효도는 며느리의 몫

시집살이 이야기 1-9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집이어도 1층과 2층의 공간은 완벽히 나뉘었다. 들어가는 현관문도 달랐으니 이것도 분가라면 분가였다. 덕분에 친정 아빠도 자주 드나들 수 있었으며 남편 친구들도 눈치 보지 않고 자주 놀러 왔다. 여러 명이 함께도 왔고, 서로 돌아가며 연인끼리 둘이서도 왔다. 유난히 친했던 오빠와 오빠의 여자 친구는 우리 집이 자기들만의 아지트 같다며 자주 놀러 왔었다. 잔잔한 호수에 나뭇잎이 떨어지며 물결이 일렁이고, 철새가 날아와 물장구치며 놀다 가듯 내 삶에도 알콩달콩한 순간들이 생겨 갔다. 전과 다른 순간들이 재미있었고 기다려졌다.


대학 시절 스무 살 때부터 남편과의 연애가 시작됐었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어울리게 된 남편 친구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한 살 차이였던 나와 남편이기에 그들과도 편한 오빠와 동생으로 지낼 수 있었고, 각자의 여자 친구들도 함께하며 재미있는 많은 추억을 쌓았었다. 친구 사이에 처음 치러지는 우리 결혼은 그들 사이에서도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었다. 오징어 가면을 쓰고, 신붓집 가족과 실랑이도 하고, 스스럼없이 밥도 먹으며 요즘은 잘 하지 않는 함잡이도 치러내 줬다. 그렇게 우리의 시작을 함께해 주었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 첫 아이인 우리 아기 또한 바닥에 발이 닿을 순간이 없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잔잔한 결혼 생활에 그들의 존재는 싱그러운 봄바람과도 같은 것이었다. 

    

“놀고 있어. 얼른 식사 차려 드리고 내려올게”  

   

그들이 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나의 단골 대사였다. 여러 날이 흐른 후엔 “갔다 올게” 이렇게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들이었다. 시부모님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그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남편의 학창 시절 친구들이니 그런 것일까. 구태여 이런저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수고하네. 얼른 하고 내려와.” 하며 미소 짓고 기다려 주었다. 나는 우리들의 밥이 아닌 시부모님의 밥을 차리러 오르내렸고, 남편 친구들은 당연하게 배달을 시켰다. 

    

“저녁 먹어야지. 친구들 올라오라 해라. 같이 먹게” 

   

밥 차리러 올라오는 나를 보며 아버님이 하는 말씀이었다. 그런 분 앞에서 ‘두 분만 드세요. 저는 밑에서 먹겠습니다.’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착한 며느리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최대한 눈치껏 찾아낸 방법이 밥상을 차려 놓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절대 ‘그냥 두고 내려가거라’ 같은 말은 하지 않으셨다. 자연스럽게 ‘이래야 하는 거구나’ 하며 또 하나를 익혀야 하는 것이었다. ‘알아서 먹을 테니 올라올 필요 없다’ 오매불망,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돌아보면 2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나만의 사색 공간이었다. 참 많은 생각들을 했다. 며느리란 뭔가. 난 이 집에서 뭔가. 나만 뭐 하는 건가. 

     

신혼 초 아버님과 함께 출퇴근하던 남편은 자차가 생기게 되며 혼자 출퇴근을 했다. 아침과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남편은 2층으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밥을 다 차려 놓고 “올라와” 전화를 해야 올라왔고, 다 먹고 숟가락을 놓으면 다시 내려갔다. 남편은 아버님과 마주 앉기를 싫어했다.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다. 가만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식구들 모두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버님의 소파 지정 자리가 있었다. 퇴근과 함께 옷을 갈아입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 앉으셨다. 리모컨을 옆에 두고 TV를 틀며 “새아가” 술상을 찾았고, 음주와 흡연을 즐기셨다. 그러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이것저것 일을 만들어 시키기 시작했다. 깨달아졌다. 가족들은 현명한 행동을 하고 있던 거였다. 

    

술이란 감정을 끌어올리기에 최적화된 것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술로 인해 흐름을 탄 감정은 제멋대로 꿀렁거리기 시작한다. “네”라는 대답만 들어야 하는 아버님의 꿀렁거리는 감정은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아버님은 당신의 한마디에 오른쪽 왼쪽으로 휩쓸려 다니는 식구들을 내려다보며 만족의 미소를 지으셨다. 식구들을 거느리는 것에 익숙한 아버님은 권력을 즐기고 계셨다. 그런 것들이 아버님의 맛있는 술안주였다. 그리고 그 상황엔 언제나 나만 서 있는 날이 많았다. 아버님의 눈에 보이는 이는 주로 나였으니까. 착한 며느리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으므로. 

    

“왜 나만 올라가? 왜 매번 나만 그래야 해?”  

   

남편과의 다툼에서 꼭 내뱉게 되는 말이었다. 남편의 대답도 한결같았다.   

   

“너도 올라가지 마.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간 건 너야.” 

    

몰라 주는 남편이 야속했다. 날 위해 2층에서 함께 해 주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혼자 남겨지는 나를 불러 데리고 내려가 주길 바라던 나날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그의 말은 대못이 되어 박혔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내가 억지로 찾아서 하고 있다 했다. 기가 찼다. 어이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층에 안 가도 된다고? 진심인 건가.   

   

아버님 앞에서 어떤 불만도 말하지 않는 그였다. 불만을 꾹꾹 눌러 참는다 이해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의 본심이 느껴졌다.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면, 내 손을 잡고 부모님과 눈 맞추며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당당하다면. 그러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그였다. 내 뒤로 숨어있는 거였다. 어차피 난 할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니까. 가만히 있으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시집 생활을 하며 제일 많이 느껴지는 감정은 후회였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후회? 아니 그것보다 더 큰 후회는 따로 있었다. 친정 부모님. 엄마 아빠에 대한 후회였다. 난 어떤 딸이었나. 부끄럽지만 엄마가 먹은 밥그릇 한번 씻어 본 적이 없었다. 시부모님께 쓰는 마음, 우리 부모님께 반이 뭐야, 반의반의 반만 썼어도 날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셨을 것이다. 우리 딸 철들었다며.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 여기선 당연했다. 너무 당연해서 의미 없었고, 더 해야 할 것들만 생겨났다. 


자식인 남편은 맘 편히 누워 TV 보는 시간에, 며느리인 난 답답한 마음 억누르며 “네”하고 있어야 했다. 난 죽을 만큼 힘들게 견디는 건데, 당연하게 여겼다. 남편조차도. 남편은 자식이지만 난 며느리 아닌가. 남편이 하는 정성에 내 정성이 더해져야 마땅한 것 아닌가. 왜 내 정성만 있으면 되는 걸까. 왜 내 정성이 남편의 몫도 되는 걸까. 이해되지 않았다. 제사에서 만난 큰집 형님이 안쓰러운 듯 나에게 한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입 닫고 삼 년, 눈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이라는 말 있지? 딱 십 년만 견딘다 생각해. 그러면 단단한 동서의 자리가 틀림없이 생겨있을 거야.” 

     

억지로 삼킨 돌덩이가 명치 가운데 틀어박힌 것 같았다. 원하지도 않는 자리를 위해 십 년을 견뎌야 하는 거였다. 난 단단한 내 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삶이었다. ‘왜 나만 이래야 할까. 왜 이런 걸까.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이런 마음을 품은 채 십 년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이해만 된다면 괜찮았다. 이해만 된다면. 여태껏 시댁 공간이 나의 감옥이라고 여겼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며느리라는 자리가 나의 감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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