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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처럼 흐르는 기억의 강

by 기공메자

<작가의 생각 한 줄>

"기억은 흐려져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을 사람 옆에 머물게 한다."


나는 요즘 가장 친한 친구가 컴퓨터다. 아내는 출근길에 오르고, 아들은 학업과 함께 수영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을 나선다. 아흔의 장모님은 노치원 차량에 몸을 싣고 하루를 보내신다. 가족 모두가 아침마다 각자의 자리로 향하면, 집은 고요해지고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이웃들의 흔적을 찾아가 댓글을 남긴다. 그렇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책과 글 속에서 보낸다. 때로는 농장으로 가 잡초를 뽑고 텃밭을 돌보다 돌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들 퇴근 무렵이 되면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 저녁 준비를 한다.


장모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장모님은 겉으로 보기엔 건강하시다. 거동도 비교적 자유롭고 말씀도 분명하시다. 그러나 초기 치매 진단을 받으신 이후로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휴대폰에 걸어둔 카드키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현관 앞에서 서성거리며 문을 열지 못하신다.


어제도 글을 쓰다가 창밖을 보니 노치원 차량이 장모님을 모셔다드리고 있었다. 얼른 주방으로 가 창문으로 현관 앞을 지켜봤다. 장모님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전화를 걸 준비를 하셨다. 카드키를 떠올리지 못하신 것이다. 서둘러 문을 열며 방법을 다시 알려드렸다. 하지만, 장모님은 카드 인식 부분을 찾지 못하고 손잡이 아래 엉뚱한 곳에 갖다 대셨다. 그 모습을 보며 ‘벌써 이렇게 기억력이 떨어지셨구나’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저녁에 퇴근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모님이 홀로 집에 오실 때를 대비해, 노치원 차량 담당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현관문이 열릴 때까지 지켜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아내에게 담담히 말했다. “여보, 장모님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자.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면 되지 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이 촉촉해 졌다. "알았어요. 당신이 집에 있으니 신경을 써 줘요."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둘 내려놓는 과정일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인간의 삶도 그 이치를 따른다. 봄의 새싹처럼 생명의 기운으로 시작해 여름의 무성함을 지난다. 그러다 가을의 낙엽처럼 시드는 노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을 만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의 여정이다.


젊을 땐 마치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힘과 열정이 가득해 어떤 것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은 결국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든다. 그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기억이 희미해져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사랑은 여전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장모님의 빈 기억을 채워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곁에서 함께 웃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나 역시 언젠가는 장모님처럼 기억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 대신 자연에 순응하는 마음을 배우고 싶다. 기억이 사라져도 지금 이 순간, 가족과 나누는 따뜻한 마음은 오래 남을 것이다. 그 마음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노년으로 향한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그것이 곧 삶의 끝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보듬는 일, 잊히기 전에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시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할 겨울을 조금 더 따스하게 해 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사라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의 변화는 보통 서서히 오지만,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온다. 예전에는 가능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불가능해지고, 익숙한 동작들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흔히 드는 생각은 “왜 이걸 못하지?”라는 짜증 섞인 의문이지만, 사실 그것은 “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했던 장면들을 하나씩 환송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장모님이 오래된 기억을 정확히 이야기하신다. 멀리 떠났던 젊은 날의 여행, 아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의 일, 심지어 돌아가신 장인어른과의 대화까지 또렷하게 떠올린다. 그럴 때면 벽돌 위에 마지막 햇살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새로운 기억은 흐릿하지만 오래된 기억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인생의 강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같아 보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깨닫는다. 치매는 단순히 “기억이 사라지는 병”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인생을 가장 빛나던 시절로 천천히 귀환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왜 못하느냐”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그때는 어땠나요?”라고 묻는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장모님은 표정을 밝히고 말문을 연다. 사람은 기억보다 감정으로 살아가며, 감정을 통해 다시 사람과 연결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때마다 배운다.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

기억은 언젠가 흐릿해지지만, 마음으로 쌓은 사랑은 끝내 잊히지 않는다. 오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작은 온기를 건네는 일이야말로 가장 깊은 돌봄이다.


<이웃의 공감 댓글>

작가님, 저도 나이가 들어감을 마주하는 시기에 접어들다 보니 그 사실을 외면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두렵고, 마음이 슬퍼지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조금씩 작아지시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예전 같지 않음을 체감하게 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얼마나 연약한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더욱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잃어가시는 장모님을 바라보는 작가님과 아내분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장모님 마음속에는 분명 따뜻한 사랑이 새겨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작가님의 가정에 평안과 행복이 늘 함께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글을 읽으며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것들에 더 마음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작가의 답글>

따뜻한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래서 순간의 빛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장모님 곁에서 함께하는 지금 이 시간이 오래도록 사랑으로 남기를 바라며, 저 역시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에게 더 많은 마음을 쏟으려 합니다. 님께서 전해주신 고마운 마음,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작가 노트>

장모님이 카드키 앞에서 망설이던 그날, 나는 오래된 계절 하나가 조용히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슬픔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묵묵한 책임감이었다. 기억을 대신해 주는 누군가가 되겠다는 마음이 글을 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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