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스물세 살이 되어 버린 앨리스 님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금 봄이 왔다. 고작 네 개의 계절이 지났지만 어느새 1년이 지났단다. 가뜩이나 서러운 일 많은 세상인데 이제 시간마저도 매정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너무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윽한 봄내음을 감상할 여유조차 상실한 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바쁘지 않으면 심란하고, 바쁘면 피곤한 이 나라에서 국민들은 여유 없이도 행복해지는 법을 찾는다. 시간을 짬 내서 영화를 본다던지 선을 봐서 연애를 한다던지 그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물론 어느 정도 적절한 합리화로 언제 입을지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다듬는 게 포인트 되겠다.
그렇게 너도 나도 행복한 이 나라, 달콤하고 러블리한 삶을 사는 우리들은 마치 동화 속 어딘가에 사는듯한 착각에 종종 빠지곤 한다. 동화란 참으로 인위적이지만 어쨌든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으니 불만은 없다. 너는 백설공주, 얘는 신데렐라, 쟤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자 됐지 싶어 다시 보니 참, 이들은 끝에 가야 행복하다. 왕비와 계모를 물리쳐야 백마 탄 왕자님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까지 굳이 에둘러갈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아는 동화 중에 일 안 하고도 행복한 그런 캐릭터가 어디 없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나만 알고 싶지만 이미 다들 알아버린 그 이름. 좀 사는 집안에 나가 놀며 재밌는 일을 찾던 그 소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온갖 시련이 한바탕 꿈이었다는 치명적인 작가 버프까지 받으면서 동화계 가장 행복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소녀라 하겠다. 그래 그럼 나는 앨리스가 돼야지. 물론 글을 쓰는 나는 슬프게도 앨리스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살다가는 굶어 죽는다, 정말로. 대신 글 속의 나는 앨리스로 만들 수 있다. 지금부터 나는 '이상한'을 과감히 지우고, 나 혼자 사는 '센치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이 나라에 사는 스물세 살 앨리스 씨는 남들처럼 열심히 일하지도, 행복을 위해 합리화된 행복을 찾지도 않는다. 그만큼 고민도 없기에 나의, 아니 우리의 앨리스 씨는 적잖이 '센치하다.' (우리가 아는 그 센치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자 그렇게 센치한 나라의 앨리스(23)님이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어쩌라고'로 끝날 법한 이야기기에 나는 나름의 매력적인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상당히 작위적이고 편협한 동화(물론 작가들에 대한 면박이 아니다.)를 꿈꾸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저마다 행복을 위해 살고 있지만 행복을 좇는 과정에서 행복을 잃는다. 바쁜 업무 스트레스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영화를 보고 전시를 보지만 어쩌면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잊으면서 위안을 얻는 걸지도 모르겠다. 연애라는 것도 사실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눈 딱 감고 생각해봤을 때 이건 아니지 생각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냥 좋고 신날 것만 같지만 막상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모르겠다', '모른다'로 표현한 건 분명 다른 경우도 있기 때문임을 밝힌다. 어쨌든 결론은 우리 모두 조금 센치해질 필요가 있다.
센치하다, 정서적인, 감상적인의 뜻을 지닌 sentimental이 한국어로 변용된 형태로 '센티하다'의 잘못된 표기이다. (그냥 '센치하다'가 더 입에 잘 붙는다.) 상대의 기분이 우울하거나 예민해졌을 때 '너 좀 센치하다'와 같은 식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실제로 단어가 함축한 본질적인 의미는 '감상적이다'가 맞다.
그렇다. 우리는 조금 감상적일, 감성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절한 감수성은 작은 것도, 하찮은 것도 큰 기쁨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일이라 생각하면 업무지만 여기에 감성을 조금 더한다면 낭만적인 집필 활동이 되는 것이다. 전시나 영화를 보더라도 내 삶과 이어져 있는 어딘가에서 깊은 공감과 기쁨을 얻을 수도 있겠다. 물론 우리는 이를 '현실을 감추고 감수성에 빠져 살자'는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로 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백설공주이자 신데렐라로서 왕비와 계모를 이겨내고 왕자님을 만나는 여정의 끝까지 직접 가야만 한다. 다만, 고식지계식으로 만들어낸 행복이 아닌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무언가를 마주하며 살자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일곱 난쟁이나 마음씨 착한 요정들이 우리를 도울 지도 모르지만, 매번 그럴 수만은 없기에 우리는 스스로 '발견'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센치해지는 것이 좋다는 것뿐이다.
나 자신도 앨리스가 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여러분'도 앨리스는 아니다. 대신 이 글 에서 만큼은 앨리스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앨리스(23)는 여러분들의 감수성을 증진시킬 일련의 감정상태와 음악, 영화, 전시와 같은 각종 문화 콘텐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녀 혹은, 그를 보며 '감상'하고 '감상적으로 살면' 된다. 물론 이제 스물셋인 앨리스가 뭘 알겠냐마는 오히려 어리고 미숙하기에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막상 시작하려니 부담스럽긴 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센치한 나라에 사는 스물세 살 앨리스가 될 거다. 뭐 오그라든다 뭐하다 하지 마세요. 기분 나쁠 지도 모르니까요, 흥(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