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작업과 삶 사이
작년엔 열 편, 재작년엔 네다섯편의 글로 한 해를 정리했는데 올해는 그럴 여유가 도저히 없어서, 한 편의 글로 요약해본다.
계속해서 나를 갱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는 걸 가지고 쓰고 만들고 작업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면서 쓰고 만들고 작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스스로를 그만 괴롭혀야 한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고, 바쁘고 쫓기고 취약할수록 생각은 계속 나를 괴롭히는 쪽으로만 흘러간다. 내가 나를 계속해서 내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나를 갱신해야 한다는 생각과 나를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여전히 길을 못 찾고 있다.
올해 나는 두 번 독감에 걸렸고 세 번 수액을 맞았다. 군대 가기 전에도 계속 바쁘게 살았던 것 같은데 몸상태가 이렇게까지 자주 나빠진 건 처음이었다. 내 딴에는 잘 챙겨먹고 달리기도 하고 충분히 쉰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고, 모든 걸 다 해낼 수 없다.
연극과 영화 바깥을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 어떤 형식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무엇을 감각하고 느낄 것인가. 나를 현실 어디에 세울 것인가.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어떻게 촘촘하되 빽빽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열려 있되 비워두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타인과, 슬픔과, 스스로와 함께할 것인가.
왜 예술이어야만 하는가. 왜 내가(우리가) 해야만 하는가. 왜 지금 해야만 하는가. 왜 이런 형식으로 해야만 하는가. 예술을 위한 예술 하지 않기.
과정을 디자인하기, 과정과 결과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어떤 과정을 제안할 것인가. <비어가는 방> 하면서 팀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단거리로 간다고 생각하지 말자. 알면서도 굳이 돌아가 보고, 저기에 답이 보이는 것 같아도 에둘러 가보자. 어떤 면에서는 스포츠 팀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의 연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했고 준비된 프로그램과 즉흥적인 제안을 적절히 수용하면서 과정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숙제는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템포과 리듬을 찾는 것이다.
결과는 없다. 혹은 허상이다. 우리는 결국 다 과정의 존재들이다. 우리 각자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어코 미끄러지고 마는 것들, 미완성과 실패, 미완과 결여의 감각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과정’뿐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우리의 손을 떠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왜, 어떤 과정을 밟아나갈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정을 잘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또 그 과정이 어떻게 관객을 만날 수 있을지, 어떻게 조금 더 ‘예술의 언어’로 그것을 소통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과는 있다. 어느 순간에는 선택해야 하고 관객을 만나서 소통해야 한다. 그렇기에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다음에 따라오는 질문이기만 한 건 아니다. 내용과 형식은 선후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연출가)인가는 조금 찾은 느낌이다. 이제 관객과 맞추어나갈 수 있는 주파수를 더 찾아야 한다(고 8월에 썼는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싶다 라고 12월에 다시 적는다)
연출이란 어떤 선을 발견하는 일, 선의 설정과 선택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가’만큼 중요한 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였다. 모든 관객을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으니 선을 발견했다면 한 쪽을 정해야 한다. 결국 연극이란 어떤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일, 어떤 순간을 만드는 일이고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공동체를 도모하는 일이다. 연극과 작업에 대한 여러 가설들이 조금씩 모이고 구체화되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보고 공부하는 만큼 자란다. 그 어떤 해보다 강의실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 내년에는 더 읽고 더 써야 한다. 내년에는 ‘팔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그게 뭘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