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유로 며칠을 괴로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고, 제가 원하는 삶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기분에 며칠을 갇혀 살았습니다. 좁은 고시원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며칠째 내리는 비와 확산되는 코로나로 인해 외출하기도 여의치가 않더군요. 방바닥에는 물이 새어 나오고 화장실엔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습니다. 곰팡이 제거제를 화장실 벽에 바르다가 문턱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 나옵니다.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라 불리는 이 세 여신은 늙은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클로토가 실을 짜면, 라케시스가 실을 감고, 아트로포스가 실을 끊는다고 합니다. 이들의 손에서 결정지어지는 '운명'은 신들의 왕 제우스조차 마음대로 간섭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생이라는 것이 신조차도 관장할 수 없는, 태초에 정해지고 결정지어진 바꿀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불행한 일이 겹쳐서 올 때,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을 찾거나 운명을 탓합니다.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방향 없는 울분을 터뜨려본 적 있으신가요? 세상 모든 존재가 원망스럽고, 세상을 저주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나의 뒤꿈치를 잡아끄는 모든 것들을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 저는 고시원에 입주할 때 딱 이런 기분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거센 빗방울에 축축이 젖어가는 저의 방을 보면서도 다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운명은 왜 이렇게 흘러갈까요?
오늘은 [대부]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의 운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 영화 [대부] 1~3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버지와 큰형 산티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에 입대한 마이클. 그는 아버지 비토의 총애를 받는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아버지의 마피아 사업에서 거리를 두고 싶어 했지만, 마약 사업에 반대하던 아버지 비토가 솔로조(상대 세력과 결탁한 마약상)에게 저격당하자 마피아 '사업' 일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를 저격한 마약상 솔로조와 그의 뒤를 봐주던 뉴욕 경찰서장을 저격하며 아버지의 복수를 합니다. 비토도 마이클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의 소매에 선홍빛 핏자국이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뉴욕에서 우위를 점령한 마이클은 결국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부'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문 밖에서 바라보는 그의 아내 케이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담겨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마피아 가족으로서의 삶. 아직은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그들의 삶 너머에서 먹구름을 한껏 머금은 태풍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태풍의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그들은 적절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을까요? 대부 1편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합법적으로 보이는' 사업을 확장하는 마이클. 그는 마피아 사업과 연결된 자신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한 번 발을 들인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가 않아 보입니다.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돈과 피로 얼룩직 복잡한 이해관계는 그가 목표에 다가서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듭니다. 그 와중에 형 프레도가 라이벌 조직의 사주를 받고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이클은 그에게 분노의 키스를 건넵니다. 자신의 손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프레도. 그는 결국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마이클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가족의 배신과 가족을 향한 복수. 조직에 들어서는 것을 그토록 거부했던 마이클은 그 누구보다도 '대부'라는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되어있었습니다.
마피아 사업을 합법적인 사업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마이클은 아낌없이 검은돈을 뿌립니다. 바티칸 은행과 연합하여 새로운 사업 파트너를 구축하고, 마피아 세력과의 관계를 청산하며 딸 메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고자 합니다만 마이클의 뜻 때로 일이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이전의 동업자들은 그의 변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마이클은 암살 시도를 당하고 바티칸과의 새로운 관계는 예상하지 못한 국면에 부딪힙니다. 설상가상으로 산티노의 아들 빈센트는 자신의 딸과 부적절한 관계를 넘나들고, 그의 건강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가 피로 물들인 꼴레오네의 이름을 깨끗이 만드는데 세상은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습니다.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아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마이클은 총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딸 메리는 그를 노리던 총알에 치명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대부의 3악장은 아들의 공연과 함께 끝이 나며, 그와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위태롭게 이어지던 피의 협주도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쓰러진 메리를 붙잡고 하늘을 향해 쏟아내던, 그의 비참한 절규는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요?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비토 꼴레오네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은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였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실력 있는 대부가 되고 맙니다. 아버지인 비토는 그가 판검사나 주지자처럼 '합법적인'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랐고, 아들인 마이클도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암살과 피의 복수는 그들이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 당시에는 괜찮아 보였던, 대안이 없어 보였던 일련의 선택 속에서 그들은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이 갚지 못한 업보는 모두 다음 세대의 피로 갚아집니다. 대부는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마이클 꼴레오네는평생 동안 벗어나고자 했던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 아래 갇히고 맙니다. 그리고 더 큰 그늘을 그의 세상에 드리우게 됩니다. 인적이 끊긴 오래된 마당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바랬던 인생의 결말이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그의 복잡하고 불행한 인생은 가녀린 운명의 실 위에서 추는 아슬아슬한 왈츠였습니다. 운명의 실을 지탱하는 탄성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욕망의 무게가 실을 끊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끊어진 실은 가련하고 여린 마지막 울림을 끝으로, 차가운 바닥에 먼지와 보푸라기로 내려앉습니다. 비토와 마이클은 다음 세대에 더 좋은 것들을 남겨주기 위해 평생을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 다음 세대의 짐과 불행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유발할지는 우리의 노력과 땀방울에 전적으로 달려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마지막 순간까지 변화를 위해 살았습니다. 다만 세상과 타협하는 방식과 수단이 도적적으로, 윤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피를 부르는 행동은 수면 아래에서 그의 파멸을 노리는 수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업 파트너와 형 프레도가 마이클을 적에게 팔아넘기고, 집에선 아내와 자식들과 끊임없이 갈등하게 됩니다. 그의 목표는 피의 대가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헛된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지려고 했으나 스스로가 굴린 수레바퀴 아래 깔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 위대한 개츠비 中 -
우리는 그의 삶을 어떤 식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인과응보? 사필귀정? 그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가 자란 환경과 문화,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선택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주장을 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평가할 때, 옳고 그름이라는 말을 쉬이 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타인의 삶을 평가의 잣대에 올릴 수 있겠습니다. 나와 다른 세상을, 다른 시대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을 말이죠. 우리가 자주 쓰는 '공감'이라는 말은 어쩌면 이론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불안정한 미래와 예측들.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헤집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운명'이라는 개념에 의지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모든 것을 '운명'과 '환경'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벽에 부딪힐 겁니다. 우리는 비록 제한된 영역이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하며 살아갑니다. 이점에서 우리가 [대부]를 통해서 몇 가지 배울 수 있는 사실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극복하지 못할 문제도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길이 타인을 해치고, 사회적 미덕을 해하는 일이 되면 안 된다는 것.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의 죽음은 사고인지, 자살인지 마지막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끌고 가지 못했고 주변의 잘못된 관심과 기대 속에서 꼭두각시 인생을 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실에 매달려 춤을 추는 삶은 제 스스로 걸어갈 근육을 키울 기회를 주지 않았고, 실을 잡은 이들의 흥미가 떨어진 순간 한스는 바닥에 고꾸라지고 맙니다. 한스는 마을의 촉망받는 인재였고 명석한 머리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어른들로 인해 그의 운명은 산산이 박살 나고 맙니다. 우매한 선택과 결정이 나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한스의 죽음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 너무나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이 또한 운명이라 불러야 할까요?
[역마]에서 엿판을 짜 맞추고 마을을 떠나는 성기. [브레이브 하트]의 자유를 외치며 맞이하는 윌리엄의 죽음. 유방에게 토사구팽 당한 한신의 후회.월나라를 떠나는 범려.그리고 고르디우스 매듭을 줄로 끊어버리는 알렉산드로스 왕. 우리는 운명의 굴레에 굴복할 수도, 세상의 풍파에 저항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건 우리는 마지막까지 삶이라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인륜과 운명이 있다면, 우리에겐 개척과 도전이라는 옵션도 존재합니다. 마냥 굴복하고 있기에는 아까운 시간들이 지금도 힘차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운명의 첫 실을 내 뜻대로 풀어내지도 못했고 언제 이 실이 끊길지 모르지만, 저는 실이 끊기기 전 세상이라는 비단에 한 올의 의미 있는 한 땀이 되고 싶습니다. 아트로포스가 내 실을 끊지 않았다는 그 하나의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 운명의 실 위에서 틀려도 좋은 탱고 스텝을 밟아야겠습니다. 인생엔 실수와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영화 [여인의 향기] 속 알 파치노의 당당한 목소리가 떠오르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