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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Mar 14. 2022

이번 토론은 찬성 측의 승리입니다!

만들어진 참관수업


... 한 이유로 오늘 토론은 찬성 측의 승리입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내지르고(패배한 반대 진영도 포함하여) 담임 선생님은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의 진땀을 닦고, 학부모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친다. 그렇게 참관 수업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이상한(?) 날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칠판에는 '학습목표'가 또박또박 정자체로 쓰여있고, 선생님은 몸에 잘 맞지 않는 처음 보는 정장을 입고, 아이들은 평소와 다른 민주적(?) 발표 진형을 갖춘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바로 학부모 참관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평소에 하지 않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수업방식의 성공적인 결말을 '연기'해야 하는 시간이었죠.


 정확한 기억나지 않지만 토론의 주제는... '심청이는 과연 효녀인가?'같은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누가 성리학의 나라 아니랄까 봐, 동방예의지국의 초등교육 기관에 아주 적합한 주제였죠. 저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사회자를 맡게 되었고, 외워야 하는 대사가 적다는 사실에 몹시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대사라고 해봤자 '~로 봤을 때, ~을 이유로 오늘 토론은 00측의 승리입니다' 이거 하나였지만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저는 제 기분 내키는 진영에 손을 들어주곤 했습니다. 뭐 그럴듯한 이유 한두 가지만 앞에 덧붙이기만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그 누구도 토론의 승패에 관심이 없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제가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대도 모든 참여자가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TV 속 대선 토론회와는 달리 토론 참가자들은(= 내 친구들)은 사회자의 절대권 권위에 어떤 불만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누가 누구 다음에 말하고, 어떤 타이밍에 끼어들지까지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으니깐요. 물론 처음에는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기존에 해야 하는 수업을 뒤로 미룬 채 며칠, 몇 시간을 연습하다 보니 아주 박진감 넘치는 토론이 어떻게든 완성이 되더군요.


 마침내 결전의 날. 우리는 200% 역량을 발휘하여 박진감 넘치는 토론을 펼쳤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발표를 하겠다며 손을 들고(물론 저는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 친구들을 호명했지만) 주제마저 '효'에 관련된 내용이니 학부모들은 '이것이 21세기 선진 교육이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효심이 깊은 아이였다니!'라는 생각에 몰래 눈물을 닦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유감스럽게도 수업의 모든 순간이 연극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지겨운 연기 연습이 끝나서 기뻤고, 선생님은 학부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을 것이며,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건강한 토론 문화를 보며 장밋빛 희망을 품었겠죠. 모두가 기뻤으니 이를 두고 해피엔딩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요?


만들어진 토론회
근데, 누구를 위해서?

 

 제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학부모 참관수업은 스스로 감시와 통제가 필요한 수동적 존재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는, 비단 학교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는 안타까운 풍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분명 일부 아이들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테고, 몇몇 학부모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박수갈채를 보냈을 겁니다. 아이를 여럿 키운 부모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겠죠. 물론 이 모든 과정을 '노력의 결과'로 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했구나!


 당시의 참관수업의 트렌드는 발표와 토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바람직하다'라고 여기는 수업 방식이죠. 문제는 그 바람직한 행동이 평소에 이루어지지 않다는 점이었죠(물론 열정적이며 도전 정신이 강한 선생님도 계셨습니다만,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토론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다른 문제는 10살 남짓의 아이들이 거짓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 있어서,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초등학교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토론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바탕으로 개별성과 개성을 갖춘 하나의 지성인으로 성장합니다. 문제는 '토론 수업'을 위해 준비하는 '토론'에서는 새로운 생각과 의견이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대 측 아이가 변심(?)하여 찬성 측을 옹호하는 순간, 정해진 각본에 따른 반박과 옹호의 모든 과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거든요. 결국 자신의 의견에 반하더라도 반복적으로 대본에 쓰인 대사를 내뱉었어야 했습니다. 엉뚱한 소리(=근거가 충분한 새로운 의견)를 하면 모두가 눈치를 주며 입을 다물게 하는...


 인기 개그 프로그램 SNL의 주현영 씨가 연기하는 인턴기자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사실 성인에게도 발표와 토론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10살 남짓의 자녀들에게 바라는 학부모들의 당연한(?) 기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강박, 건강한 질문과 토론 문화에 대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선생님의 칭찬에 목이 마른 아이들이 만나 모두를 만족시키는 환상의 비빔밥이 완성된 겁니다. 재료가 무엇이냐고요? 모르겠습니다. 다 섞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거든요.


 평소에 미리미리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참관수업을 며칠 앞두고 빠짝 연습을 시키는 것이 선생님들에게는 훨씬 쉽고 간편한 일이었을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경험했던 '평소에는 하지 않는 일을 연기하는 행위'는 중, 고등학교는 물론이며 군대까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VIP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 댓바람부터 축구 골대를 옮기고, 아스팔트가 윤이 나도록 빗질을 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유감스럽게도 VIP는 저희 부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회자로서 내리는 '승리 선언'은 이 거짓 연극의 완벽한 피날레였습니다. 콘웨이 백악관 수석 대변인이 '대안적 사실'이라는 기발한 단어를 사용하여 백악관의 입장(=거짓)을 옹호한 것처럼, 학부모 참관수업의 토론회는 거짓으로 만들어지고 거짓으로 완성된 '대안적 성취'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알맹이는 없지만 그럴듯한 껍데기, 참여자와 방관자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사이에서 텅 빈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는. Post truth era. 탈진실 시대는 최근 들어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집단 지성의 성장과 SNS의 활성화로 재수 없게(?) 정체가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네요.


 보여주기식 사회. 우리가 묵인한 일련의 사건들로 태어난 거짓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보며, 과연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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