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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Aug 20. 2021

생명과 생계 사이 균형을 위한 ‘가늘고 길게’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감염병 대응 체계 구축이 방역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

한겨레신문이 최근 방역 기조 전환을 위한 기획기사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저도 한 꼭지 맡아 기고문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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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올 2월 단계적 봉쇄 완화 계획을 발표하며 제시한 ‘출구전략 로드맵’ 문건은 이렇게 시작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내내 정부의 최우선 목표는 시민들의 생명(lives)과 생계(livelihoods)를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높은 전파력에 낮지 않은 치사율이 더해지며 기저질환자나 고연령층 감염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관리에 실패해 감염이 폭발적으로 확산하면 의료체계가 붕괴하여 다른 질환 환자의 진료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부의 적절한 개입은 필수다. 하지만 정부 개입의 강도가 커지면 그로 인해 시민들의 생계가 위태로워진다.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매출이 감소하고 비대면 서비스업종 일자리가 사라진다. 학교를 닫으면 돌봄 공백으로 인해 일을 그만두는 학부모가 생긴다. 국경이 막히면 무역업체의 거래비용과 외국인력 의존 산업의 노동비용이 증가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피해는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휴교로 인해 학습 결손, 교육 양극화, 사교육비 증가, 온라인 매체 의존도 증가, 장애아동 퇴행 등 돌이킬 수 없는 비용이 발생한다. 외출 금지와 모임 제한 지속은 비만, 우울, 가정폭력 같은 보건상의 피해로 이어진다. 영유아 시기 사람들과의 교류 부족은 사회성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 자유와 인권의 과도한 침해, 개인정보 노출, 방역 수칙 준수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감염자 낙인찍기, 종교 활동 저해 등의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강력한 방역 조치는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을 막아주는 한편 시민들의 생계가 망가지는 부수적인 피해를 동반한다.


앞서 언급한 영국의 출구전략 문건에도 코로나19의 피해가 다각도로 기술되어 있다. 우선 델타 변이 유행 상황과 그로 인한 입원, 사망자 변화 추이를 시각화하여 제시한다. 정부의 봉쇄 조치로 추가적인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도 강조한다. 바로 그 뒤에 영국이 팬데믹 시기에 입은 사회경제적 피해를 수치화하여 보여준다. 2020년 한 해간 국내총생산(GDP)이 9.9% 하락하여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역성장을 경험했다. 고용유지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10개월간 82만8000명이 직장을 잃었다. 청년, 여성, 비정규직, 이주민, 저임금 노동자가 더 큰 피해를 보아 불평등이 심화했다. 경제적 피해에 더해 강력범죄 및 마약범죄 증가, 정신 건강 악화, 학습 결손, 돌봄 부담 증가 등 다양한 사회적 피해를 나열한다. 이는 영국이 델타 변이 유행의 한복판에도 출구전략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된다.


코로나19가 ‘짧고 굵은’ 개입을 통해 막을 수 있는 질병이라면 고강도 방역대책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사이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생계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다. 영국 정부 역시 봉쇄 도중 재정지원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팬데믹 대응을 위해 GDP의 16% 이상을 추가로 지출했으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봉쇄로 발생한 임금손실의 3분의 2까지 정부가 보전해주고 피해업종에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취약계층에 세금 납부를 유예하고 채무 상환을 지연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앞서 말한 사회경제상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장기화하면서 체증하는 팬데믹의 피해를 전부 보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육이나 보건상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조차 없다.


유행이 지속한 지 이미 1년 반이 지났고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초고속으로 백신이 개발됐지만 전 세계적인 공급 부족과 접종 주저 현상으로 인해 지연된 접종은 거듭된 변이의 출현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조속한 코로나19의 종식이 요원해진 지금 장기적인 관점으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짧고 굵게’가 불가능하다면 ‘가늘고 길게’ 가는 방식으로 방역 기조를 바꿔 생명과 생계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향한 시도는 새롭지 않다. 지난해부터 생활방역위원회 발족이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재편 등 유행 장기화에 대비하여 일상과 방역 사이 균형을 잡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부작용이 큰 고강도 봉쇄를 비용 효율적 방역 조치로 대체하고, 이에 따르는 감염 확산에 대비하여 의료체계 역량을 높여가는 과정이 대응 체계 정비의 핵심 요소였다. 과학적 위험 평가를 통해 안전한 활동과 안전하지 않은 활동을 구분한 후 시민들이 안전한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정도 방역 기조 전환에 포함되었다.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지난 1차 유행 때 지금보다 감염 규모가 작았음에도 시민들의 이동량과 활동 범위가 더 크게 위축되었다. 지난해 1분기 민간소비가 6.6% 하락하여 코로나19 피해가 큰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가 입은 타격과 비슷했다. 그 후 몇 개월에 걸쳐 대응 체계를 정비한 결과, 훨씬 규모가 컸고 대응 강도도 높았던 3차 유행 때 민간소비는 1.3% 감소하는 데 그쳤다. 올 1~2분기에는 계속 5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1.2%, 3.5% 민간소비 성장을 경험했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의 등장으로 인해 더 전향적인 방역 기조 전환이 가능해졌다. 백신의 감염 및 중증, 사망 예방 효과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면서도 의료체계 부담을 줄일 여지를 크게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고위험군 상당수가 백신 접종을 받았지만, 일각에선 백신 접종률이 더 올라갈 때까지 방역 기조 전환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백신 접종만으로 유행을 온전히 통제하기 어렵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외국 상황을 보면 접종이 많이 진행된 나라에서도 유행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접종 완료율이 60%를 넘은 이스라엘과 영국의 최근 7일 평균 일일 확진자는 각각 10만 명당 64명, 42명으로 우리나라 4단계 기준인 10만 명당 4명의 10배가 넘는다. 유럽에서 접종률이 가장 높은 몰타(접종 완료 92%)와 아이슬란드(접종 완료 71%)에선 각각 10만 명당 16명, 31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접종률이 높으면 유행 규모 대비 중증환자와 사망자 비중이 줄어들지만, 미접종 감염자의 절대 수가 많아지면 전체적인 사망률 증가를 피할 수 없다. 위에 언급한 나라들은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모두 우리나라보다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백신 접종률이 ‘충분히 높아도’ 접종만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어렵다는 시사점을 남긴다. 백신 접종이 만능이 아니라면 개인 위생수칙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 다른 수단의 보조가 일정 부분 필요하다. 또한 혹시나 막지 못할 확산에 대비하여 중환자 병상 확충, 역학조사 범위 및 시설 격리 기준 조정, 재택 치료 확대 등 의료체계를 준비해야 한다. 즉, 접종률과 무관하게 ‘질병의 위험’은 낮추고 ‘위험을 감당할 역량’은 늘리는 대응체계 정비의 대원칙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접종률이 낮은 상황에선 그에 맞는 최적의 정책 조합을 찾으면 되기 때문에 접종률이 올라갈 때까지 체계 정비를 미룰 이유가 없다.


요약하자면, 방역 기조 전환은 위험의 정확한 평가, 비용 효율적 대응 개발, 감염 확산에 대비한 의료체계 정비, 정보 제공을 통한 시민들의 의사결정 지원 등을 모두 포괄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감염의 위험을 낮추고, 생계에 대한 타격은 줄이며, 방역 조치에 대한 시민들의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 ‘위드 코로나’를 백신 접종 후 방역 완화라는 좁은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시민 전체가 참여하여 안전하며 지속 가능한 감염병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시행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이미 늦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https://m.hani.co.kr/arti/society/health/10084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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