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다
'추앙'이란 단어가 선풍적으로 인기였던 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해 찾아봤더니 올해(22년) 4월이었네 이런.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사라지고 잊혀 지난해 언제쯤인가 기억을 더듬던 중이었다. 올해 4월이었구나!.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 일지'를 보면서 내 삶에서 그렇게 열망했던 '지원, 격려'를 이분도 열망했다고 생각하니 공감받는 느낌이 든다.
'추앙'에 이어 한동안 '해방'이란 단어에 꽂혀서 '자기 계발'과 '자기 해방’의 차이에 대해 책을 찾아 읽은 적이 있다. 작가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졌더니 박해영 작가는 언론이나 매체에 자신을 알리지 않는 편이라 자료가 없다. 작가 사진도 딱히 보이지 않아 신비주의에 싸여 있다.
유튜브에 용수 스님 명상 방이 올려져 있어 참가 신청을 했더니 톡 방에 초대되었다. 누구나 쉽게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는 오픈 채팅방이라 열려있다는 느낌이 참 좋다. 그렇게 용수 스님과 연결이 되었다. 용수 스님이 최근 경복궁 옆에 세첸명상센터를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박해영 작가와의 만남' 안내 공지가 떴다. 두말없이 신청했다. 누굴 좋아한다고 찾아다닌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주말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기가 귀찮다. 하지만 기다렸던 만남이라 기쁘게 집을 나섰다. 과연 박해영 작가다운 발걸음이었다. 작가와 친한 지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렵게 만남이 성사되었다.
박해영 작가는 다른 드라마는 대본이 나왔는데 왜 아직 드라마 대본이 책으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드라마와 종이에 인쇄된 글은 달라요. 드라마 대본은 배우들을 통해 대사로 전달해요. 드라마가 나오면 작가는 역할을 다 한 거예요. 드라마 배우들을 통해 표현된 대사가 전부예요" 해서 드라마가 끝나면 작가 인터뷰를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해영 작가는 관계가 막히거나 절망적인 일이 생겼을 때 홀로 앉아서 간절히 기도를 한다고 한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셈인데 어떨 땐 4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묵상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앉아서 묵상하면서 때로 해소되기도 하는데 어느 날 간절히 기도하는 도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도는 다 뻥이야. 신에게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고 있구나. 너 정말 그 사람이랑 잘 지내고 싶어? 그럼 전화 있잖아. 하나님에게 잘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전화해서 사과하면 되잖아. 근데 왜 기도만 하고 있어? 진짜는 그 인간과 잘 지내고 싶어? 진짜는 싫어하잖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진짜 네 마음은 사랑하기 싫잖아. 근데 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야?"
자신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보지 않고 거짓 기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후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말은 거짓일 수 있구나. 이후 정직하게 자신을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박해영 작가가 말하는 정직한 기도, 정직하게 자신을 보는 것, 정직하게 인정하는 의미가 가슴을 콕콕 찌른다. 속으로 정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직장 정리하는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너는 그의 고통에 눈 감고 있잖아. 안 보고 싶어 하잖아. 남편이 가족부양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먹고사는데 불편함 없이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잖아"
정직하게 자신을 보기. 남편 일로 힘들어지기 싫고 내 일상이 달라지는 걸 원치 않고 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될걸 생각하면 화나고 그러면서 남편이 자유롭게 살길 바란다고 말하잖아. 정직하게 자신을 본다는 건 뼈를 때리는 자각을 의미한다. 자신이 보지 않으려 회피하고 있는 게 뭔지 그걸 바로 보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상대와 관계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든 새로 시작하려면 정직하게 바로 보기부터 해야 할 일이다. 그 지점을 박해영 작가가 언급하고 있다. 쨍그랑 뼈 때리는 정직한 보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 정직한 보기, 통찰이다.
박해영 작가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대사들은 일상생활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말들이다 드라마 작가 시절 후배 작가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상하게 그 말을 듣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거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한숨 자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후배 아버지 말이 무척 위로가 됐다고 한다.
'나의 아저씨' 곳곳에 이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박동훈이 대표인 후배와 자신의 아내 외도 사실을 알고 이지안과 술을 마시면서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스님이 된 동네 촉망받던 친구를 찾아간 동훈에게 스님이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니 돌아가서 아무것도 아닌 듯 잘 살아! 괜찮아”
예전에 '나의 아저씨'를 보긴 봤지만 정직하게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주변에 주인공 박동훈과 비슷한 ’성실한 무기징역수' 들이 많아 그들의 삶에 연민이 있지만 지독한 답답함이 있다. 애증 관계라 할까?
박해영 작가와 만남 이후 '나의 아저씨'를 다시 시청하고 있다. 박해영 작가는 경기도 군포에서 태어나 50대를 지나는 지금까지 고향에서 살고 있다.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로 지하철 출퇴근하는데 1시간 40분 이상 걸리는 곳에 산다. 나도 경기도 살면서 서울 시내 나가려면 어딜 가든 1시간 40분은 잡고 나가야 한다. 박해영 작가가 돈이 없어서 군포를 떠나지 않는 걸까? 그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그녀 주변 사람들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경기도 서민들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기에 쓸수 있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다.
'애정, 관심, 추앙' 사람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따뜻함이다. 사랑이란 말이 너무 흔해 사랑이란 말로는 관계에서 필요한 것들을 채울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바람도 기대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사람에게 사랑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추앙 정도는 해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이 오래 남는다. 작가와의 깊은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