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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int heavy Nov 10. 2020

'장애인의 가족'은 부모 뿐인가요?

비장애 형제와 특수교사의 경계에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28조(특수교육 관련서비스) ① 교육감은 특수교육대상자와 그 가족에 대하여 가족상담, 부모교육 등 가족지원을 제공하여야 한다.  <개정 2019. 12.10.>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시행령
제23조(가족지원) ① 법 제28조 제1항에 따른 가족지원은 가족상담, 양육상담, 보호자 교육, 가족지원프로그램 운영 등의 방법으로 한다.
② 제1항에 따른 가족지원은 「건강가정기본법」 제35조에 따른 건강가정지원센터,「장애인복지법」제58조에 따른 장애인복지시설 등과 연계하여 할 수 있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서는 가족 지원을 이렇게 명시해 두고 있다. 특수교육 대상학생의 가족들에게 상담이나 보호자 교육, 별도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더이상 법적 지원의 대상은 장애인이나 지원이 필요한 당사자에 제한되지 않고, 그들의 가족들에게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필요한 제도이자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특수교사로 학교 현장에 있다보면, 그 가족 지원이 장애 학생의 부모에게로 한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장애인의 가족은 부모 뿐이던가?

 사실 이전의 패러다임은 부모교육에 집중된 것이 맞았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두려움과 분노, 좌절, 무기력함 등 그들의 부모로서 겪는 고충를 위로하고, 좀 더 알맞은 훈육 방법을 교육하고, 부모들의 심리적·정신적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서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비슷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의 모임도 필요했다. 그렇게 많은 장애인 부모회 같은 자조모임이 생겨나기도 했다. (진심으로 수많은 부모님들과 보호자님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교육청이나 복지관, 관련기관에서 주최하는 가족지원은 대부분 학부모 연수, 부모교육이란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와 관련된 수많은 공문과 게시글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대부분 그렇다. 진짜 간혹 장애 학생의 형제 자매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 협조 요청이 오곤 하는데, 그마저도 사설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1회성에 그치는 가족 캠프가 대부분이다.  




 나는 장애 학생들의 형제자매를 위한 프로그램과 심리상담, 그리고 지속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어린 아이가 사고를 당하는 것과 성인 어른이 사고를 당하는 것의 차이.'


 물론 사고를 당한다는 것은 나이불문하고 개인에게는 비극이자 엄청나게 큰 데미지를 남긴다. 그러나 성인이 사고를 당할 경우, 이 사고의 원인과 일어난 과정, 후속대처, 치료방법 등 일련의 연속선상에서 계획을 세우고 대처할 수 있다. 물론 방법적인 면에서 적합한 계획이 될 수도 있고, 잘못된 방법을 계획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사고를 당할 경우에는, 이 사고가 무엇이고 왜 일어났고, 이 다음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혼동과 괴이한 상황 속에서 눈물 흘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운이 좋은 아이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만나 잘 대처할 수도 있고, 정신력이 강한 아이는 스스로 버텨내고 살아남을 것이다.


 장애 형제를 만나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사고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부모도 자신의 아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세상이 무너졌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계획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성인이 되고 나서 그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만, 장애 형제를 둔 비장애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스스로도 다 자라지 않은 유아기 혹은 아동기에 맞닥뜨리는 어려움이다. 내 형제자매가 어디가 아픈 것인지, 왜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왜 우리 형제는 나와 대화할 수 없는지, 그 이상함이 시간이 지나면 고쳐지는 것인지, 엄마와 아빠는 왜 맨날 우는지 등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허허벌판에서 그저 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련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 나서도 지속적이고 연령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다. 내 형제가 어디가 아픈 것인지, 그래서 이 장애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들이 나의 물건을 망가뜨리고, 나를 향해 폭력적인 행동을 할 때 나의 상처를 치유해줄 심리치료가 필요하다. 부모님이 장애 형제를 데리고 치료실로 병원으로 다니느라 나를 돌봐줄 여력이 없을 때 나와 함께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부모님이 장애 형제와 나를 차별한다고 느낄 때, 가족들로부터 과도한 압박감과 기대감을 받게 되었을 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담사가 필요하다. 장애 형제와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 나의 상황을 알아주고 함께 도와줄 친구들과 선생님, 학교 직원들이 필요하다.


 이 정도만 해도 장애 형제를 둔 비장애 형제자매들에게 가족지원이 필요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면, 은 부모님 아래서, 때에 맞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누군가 덕분에, 혹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때론 다독여가며 이 어려운 여정을 잘 살아온 그대를 응원하고 격려한다. 그러나 그 사고로부터 나를 도와줄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거나 여전히 그 사고 현장 속에서 피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에게 위로를 건넨다.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저 어린 시절 사고를 만났을 뿐이고, 적당한 때에 도움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도움을 요청할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 제도와 사회 장치가 바뀌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개인의 용기는 그보다 조금 더 빠를 수 있다. 마치 사고가 났을 때 보험사에 도움을 요청하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하다 못해 지식인에라도 물어보고, 후유증 때문에 병원이나 치료센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실제로 나는 상담센터의 도움과 글쓰기를 통해 많이 회복했다).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도움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힘이 된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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