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없이 둘이 살아요
아내는 서울태생, 나는 대전태생!
서울 여자와 대전 남자는 제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서울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교직생활 잘하던 아내는 역마살 있는 남편을 잘못 만나 이곳 제주도까지 오게 되었다. 나야 태생이 지방이어서 서울에서 살다가 대전이든 제주도이든 어디 살아도 상관없지만 서울 사람의 입장에서 지방, 그것도 제주도 섬에 내려와 산다는 것은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행히 성격이 나보다 씩씩하고 당찬 덕분에 제주생활을 잘해내고 있지만 아내가 가끔 섬살이의 고단함과 제주도 특유의 텃세에 현타를 느낄 때면 어김없이 원죄의식이 느껴져 미안했다.
"여보, 내가 많이 미안해 하는 것 알지?"
라고 말하면 즉시 되돌아 오는 말!
"응~~! 쭉 미안해 하며 살아."
아내는 결혼전에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반면에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집돌이여서 친구가 없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내려오니 두 사람 사이에 공통분모가 생겼으니 그건 이제 둘 다 친구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워낙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은데 놀라운 것은 걱정과 달리 아내도 이러한 생활을 너무도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 많아도 소용 없더라구. 어차피 자기 시간만 빼앗기고 피곤하기만 하지, 난 지금이 좋아."
그렇게 우리는 제주도에서 친구 없이 둘이 알콩달콩 지내고 있다. 제주도 지인들은 이런 우리 부부를 굉장히 신기해 하는데
"매일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요?"
라던가, 가끔 인근학교로 강의를 갈 때도 같이 다니는 우리 부부를 보고
"아유~~ 항상 두 분은 같이 다니셔."
라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낸다. 같이 책도 쓰고 한 사람만 불러도 세트로 다니는 우리가 참 신기한 모양이다.
우리 부부는 퇴근 후에도 노상 붙어있는데 집주변 헬스장을 같이 다니고 쓰레기를 버릴 때나 편의점을 갈 때도 혼자는 안 간다. 이런 분리불안 같으니라구! 이런 우리 부부의 단짝 놀이에 재미를 더해준 일이 있는데 올해초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제주도 가장 번화가인 이곳은 아파트 주변에 온통 음식점과 술집 투성이다. 한잔의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이곳은 천국과 같았다. 하필이면 아파트 정문에서 다섯 발자국만 나가면 분위기가 기가막히는 이자카야가 있어 가만히 집에 있다가도 눈이 맞으면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 없이 눈으로 말한다.
'갈까?'
아내와 직장생활 외에는 모든 시간을 붙어 있으니 우리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 부부 둘이서 거의 매일 술집에 앉아 직장 얘기, 가족 얘기, 사람 얘기를 하다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때쯤 일어나 집에 오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이야기가 있기에도 힘이 든다. 우습게도 집앞 단골 이자카야에 갈 때면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민망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얼마전 아들이 한 이야기에 이러한 일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엄마, 아빠 다투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비록 친구는 없고, 술값은 늘어가지만 자식들에게 사이좋은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냉랭한 집안보다는 낫지 않을까?
참, 부부가 오래 같이 살면 닮아간다고 하던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아내가 집에만 있어도 만족해 하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그리고 별로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던 제주도라는 낯선 곳에 손목 잡혀 끌려내려와 지금은 나보다 행복해하며 살고 있으니 고맙고 다행이다. 이런 아내를 위하여 나도 중심을 잡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언젠가
"난 여보 보면 나때문에 제주도까지 내려온 것 같아 항상 죄책감이 있었는데, 여보가 만족해 하며 사니까 이제는 그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하고 했다가
"그걸 왜 여보가 판단하는데?"
라는 대답에 잠시 벙~쪘던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사는 것보다 좋다고, 차 안 막히고 여유 있고, 바다를 매일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아내! 아내가 제주생활에 만족하며 살아 다행인데..... 나는 언제쯤 가슴 깊숙하게 남아있는 그 미안한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여보, 이제 그만 용서하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