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리마 파시'

- 표면상의 진실이 진실인가 아닌가

by 훌훌

프리마 파시(PRIMA FACIE)

라틴어에서 유래된 법률 용어 '일견(一見), 표면상의(진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초대권을 구해 온 딸과 남편이 동행하여 퇴근 후 신당역 충무아트센터 지하 2층 중극장으로 갔다



1인 극으로 세 명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공연한다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

고개 끄덕여지는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기대를 불러온다

딸은 김신록을 낙점했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다른 2인 공연을 본 것은 아니지만 김신록 버전에 흠뻑 빠지고 나니 다른 사람 버전은 궁금하지도 않아짐)



호주 인권 변호사 수지 밀러가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고

영국과 미국에서도 공연되어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변호사 룩을 걸친 '테사' 가 무대 한가운데로 나온다

자신만만하게 경쾌하게 자신이 하는 일해온 일을 자랑하듯 말하는 테사는

성폭행범을 변호하여 무죄를 선고받게 하는 승소율 높은 변호사다

그런 테사에게 그 일이 일어난다

782일에 걸친 지난한 싸움을 하게 한 일

자기가 변호한 강간범이 승소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피해자 테사가 질 것이 뻔하지만

그럼에도 나서서 말하고자 한다



성폭행 피해자는 피해자이면서 증인이 되어야 한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풀이해서 잊고 싶은 그날 일을

계속해서 디테일하게 설명해야 한다

'법'이 그걸 요구하고 있다

테사의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상대 변호사가

피해자 테사에게 그날의 악몽을 되살리라 요구하는 건

갈가리 찢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절규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증명하고 또 증명하며 괴로워한다



주로 가해자인 그들이 만들어낸 법이라는 게 얼마나 기만적인지 깨닫는 순간이다

테사는 관객석을 돌아다니면서 주장한다



"내가 아는 건 오직

어딘가, 어느 때,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



테사를 연기한 김신록은 후반으로 갈수록 눈에 띄게 초췌해져 안쓰러울 지경이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지만

멈추지가 않는다

테사에게 고스란히 감정 이입된 관객은 "하아..." 한숨짓고

어떤 사람은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친다



'왜 내가 당한 일을 믿지 않는가'

'왜 나를 이 법정에 벌거벗은 듯 세워두는가'

상대 변호사는 테사를 비웃으며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는가"

"이건 곧 허락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목소리 높여 멈추라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

. . . . . .


숨죽인 관객들은 테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과연 진실은 어떤 얼굴(FACE = FACIE)이어야 하는지

법은 어떻게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응징해야 하는지

지켜보고자 한다



귀갓길 말이 없어진다

파주에서 서울 중구 아트센터까지...... 피곤하기도 하지만

하늘이 열린 이래로 크게 나아지지 않는 성폭력의 역사를 새삼 재확인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사법 시스템을 목격하고 나니

나는

지하철에서 더 더 땅속으로 잦아드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더



"내가 아는 건 오직

어딘가, 어느 때,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작가의 이전글32년 차 캥거루 양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