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피아노 배워서 뭐 하려고?

56년 만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by 엄재균

“요즘 무슨 재미로 살고 있나?”

“이 나이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냥 눈뜨면 또 하루, 밥 먹고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삶이 천연색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에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 앞날이 정해진 듯이 삶의 색깔이 희미하게 무채색으로 변하고 활력을 잃으면서 젊은 시절 그렇게 원했던 시간적인 여유가 오히려 지루하고 무료해지기까지 한다.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살아가는 의미를 가져주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2020년 9월 3일 자, 그러니까 벌써 거의 6년 전이었다. 브런치에 “50년 만의 피아노 연습”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날이었다. 그때는 정말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배우려는 동기도 생겼다.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어느 중년의 노인이 신촌거리에서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가을의 속삭임”을 멋지게 치고 있지 않은가? 신촌거리가 아니라도 집에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즐기고 싶었다. 신년에 새로운 각오로 체육관을 가듯이 피아노를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딸이 디지털 피아노까지 사주면서 나를 응원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본이었다.


유튜브를 검색하니 독학이 가능할 것 같아서 캐나다에 살고 있는 교포가 운영하는 레슨을 신청하고 교재를 구입했다. 그리고 약 3개월이 지났을까? 2021년 1월 9일, 15회 차 영상을 본 기록이 교재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지만 그 이후에는 흔적이 없다. 혼자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약 3개월 동안 연습하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설렁설렁하다가 점차 손을 놓으면서 결국 다시 포기하고 말았다. 슬럼프에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돌이켜보면 독학한다는 것이 무모하고 무지한 행동이었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에 비해서 음정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나마 독학할 수 있는 여지는 많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다시 할 수 있도록 누군가 옆에서 조언과 격려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애만 쓰다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다시 또 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음악이 전공이어서 반 전체 학생이 악기를 하나씩 해야 했다. 난 과감하게, 아니 선생님의 무언의 압력과 어머니의 과한 교육열에 첼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즈음에는 바이엘 교본으로 피아노를 배우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 관두었던 기억도 살아난다. 모두 실패한 기억밖에 없다. 내가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타율에 의해 끌려갔기 때문에 목표도 없었고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시작할까?

이 나이에?

연주회를 열 것도 아닌데…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난 벌써 60대인데, 늦지 않을까?


육십을 한참 넘긴 나이에 가능할까? 100세 할머니가 피아노를 능숙하게 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1924년생이니 지금은 만으로 102세가 되셨겠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길 바랐던 그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시절 다니던 학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폐교되면서 학업을 포기했다. 그 후, 71세가 되어서야 다시 피아노를 익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아노가 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위대한가? 그 할머니를 닮고 싶었다.


또 다른 희소식을 들었다. 미국 UCLA 대학의 앨런 카스텔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전반적인 호기심은 감소하는 경향이 있지만, 특정 주제나 관심사에 대한 순간적인 궁금증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라고 한다. 더구나 “이런 선택적 호기심과 관심사에 대해 꾸준히 배우려는 노력은 치매를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라고 했다. 설득력이 있는 연구 결과였다.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의지는 노년기에도 정신을 지속적으로 예리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많이 나와 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눈으로 악보를 보면서 읽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양손으로 멜로디와 반주를 넣고 발로 페달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뇌활동이 왕성하지 않을 수 없는 동작들이다. 정교한 손가락 움직임은 뇌에 매우 효과적인 자극을 준다고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면 뇌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치매도 예방된다는 것을 누구나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자.


근데 왜 그때 포기했을까? 의지의 문제일까? 습관 때문일까? 포기한 이유가 의지가 박약하던 습관이 들지 않든 관계없다. 이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다음에 다시 하지 뭐’ 이런 핑계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시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겠다, 1년, 2년 아니 10년이 걸린다 해도 해 내고 싶다. 다시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절대 늦지 않았다’고 말이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겠다.



어릴 때 첼로를 배우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정말 싫었다. 아직도 연습할 때의 장면이 기억난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은 운동장에 놀고 있을 때 난 친구 한 명과 둘이서 첼로선생님한테 레슨을 받고 있었다. 어느덧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가고 휑하니 남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갈 때면 마음이 슬펐다. 이사를 하면서 첼로 목이 부러졌는데, 그게 나는 너무 기뻤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바이엘과 체르니와 같은 교본으로 배우지 않으련다. 기초가 중요하긴 하지만 나한테 맞는 기초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집 근처 피아노 학원을 유심히 보고 검색을 하면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상담을 받았다. 일단 여선생님의 인상이 후덕 지고 편안해서 좋다. 우선 내가 칠 수 있는 곡을 치라고 해서 “나의 살던 고향”을 반주를 넣어 더듬더듬 쳤다. 어설픈 나의 실력을 알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기본 음계부터 시작해서.


골프를 처음 배우는 사람을 ‘골린’이라고 한다. 수영은 ‘수린’이, 그럼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인 나는 ‘피린’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꿈나무 어린이가 되었다. 내 어릴 때는 자율적이지 못하고 목표도 없었기에 중간에 포기했었다. 이제 자율적으로 시작했으니 목표를 정하자.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하고 싶지만 일단 지금은 잊어버리자. 목표를 당장 가능한 범위 내에 정하고 그 지점을 향해 매진하고 싶다. 단기 목표는 노사연의 “만남”을 코드로 연주하는 것으로 잡았다. 조금 더 긴 목표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와 평소 치고 싶었던 “가을의 속삭임”으로 정했다.


왜 피아노를 배우려고 하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내가 직접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크다. 궁극적으로는 쇼팽과 모차르트 곡 중에 쉬운 곡을 직접 치고 싶다. 평소 즐거이 듣기만 하던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도 멋들어지게 치고 싶다. 영어를 배우는 이유도 외국에 여행 가서 자유롭게 현지인과 대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는가?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 기초도 중요하다. 갈등이 생긴다. 기초를 어떻게 재미있게 배울까? 일단 제대로 배우고 싶다.


피아노 레슨, 첫 시간이었다. 중학교인가? 고교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나? 높은 음자리표에 샤프를 붙이는 순서인 “파도솔레라미시”. 당시 음악 선생님이 이것은 무조건 외우라고 했다. 이 음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모르고 외운 기억이 난다. 당시 선생님은 “파도소리가 날 때 라미시가 생각난다”라고 외우라고 하는 것만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이것이 왜 필요한지 언제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은 배운 기억도 없다. 그냥 외워서 시험 치고 난 후 바로 잊어버렸다.


학원 선생님은 왜 이러한 순서대로 음계가 달라지는지 설명하는데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러한 순서대로 조표가 만들어지고 조성을 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다. 어린이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성인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이러한 느낌일 게다. 마치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느낌이다. 영어를 배우는 첫 번째 단계는 무엇보다 먼저 알파벳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피아노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으뜸음이 ‘도’인 C Major를 친다. 근데 왜 ‘도’를 ‘C’ 혹은 ‘다’라고 하지? 이탈리아어로 ‘도’, 영어로 ‘C’, 국어로 ‘다’라고 한다. 흠, 그렇군!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음반을 눌러본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마치 A, B, C 알파벳을 처음 배우는 기분이다. 음, 느낌이 좋다. 피아노 건반에서 3번과 4번 사이가 반음이구나. 7번과 8번도 마찬가지 반음이네? 그럼 으뜸음이 ‘레’가 되면 어떻게 바뀔까? D 메이저(라장조) 조표가 된다. D Major로 바뀌면 샤프가 어디 붙지? 3,4번과 7,8번에 반음이 들어오니 ‘파’와 ‘도’에 붙는구나. 그래서 ‘파도…’ 순서로 샤프가 붙어지는구나. 마치 우주의 큰 비밀을 알아낸 듯이 마음이 흐뭇하다. 어린이가 국어를 깨우치는 순간이라면 너무 과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배움의 즐거움이 생긴다.


이제 이론을 조금 알았으니 실전에 들어가야 한다. C 메이저 조성을 가진 음표를 오른손과 왼손을 함께 사용하여 친다. 왼손이 가끔 음을 놓친다. 반복하여 연습하니까 실수 없이 칠 수 있다. 4분 음표에서 이제 8분 음표를 가진 악보를 보고 다시 연습한다. 조금 더 어렵다. 하지만 이 또한 연습을 하면 된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못하던 것을 조금씩 더 잘하게 되는 과정이 즐겁다. 다음 레슨시간이 기다려진다. 집에서 연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학원을 나왔다.


봄바람이 아직 차갑다.

그 바람마저도 신선한 느낌이다.



[사진: Unsplash의 Felicia Buitenwe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