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직'을 하게 된 이유
그동안은 말레이시아에 관련된 글만을 연재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을 자유롭게 써보고 싶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조용한 사직 (Quiet Quitting)'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조용한 사직이란 조직에서의 승진 및 연봉 상승 등의 전통적으로 여겨지는 성취들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최소한의 일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일에 대한 열정은 식히고, 그 열정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쏟는 것이다.
그 대상은 가족, 취미생활, 애완동물 등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명확한 범주는 모르겠지만) 소위 말하는 그 MZ세대의 중간 나이 즈음에 있는 내가 바로 그렇다.
나는 조용한 사직 중이다. 현재 회사에서 일한 지는 이제 3년이 되어간다.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딱 2년까지는 열심히 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조용한 사직을 하게 된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재직 중인 외국계 회사의 경우 외국과의 근무시간을 맞추기 위해 쉬프트 (Shift)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고로 자연스럽게 내가 속한 프로젝트에도 야간 근무가 있었다.
나는 그 프로젝트 기간 총 2년 동안 1년 반을 줄곧 야간 근무를 섰다. 그 1년 반 동안은 정말 햇빛을 제대로 쬔 기억이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다.
장기간의 야간 근무로 인해 면역력이 약해져 목감기라도 한 번 걸리면 열흘은 가는 게 일상이었고, 젊은 나이에 탈모와 피부 변색까지 겪게 됐다.
쉬프트 근무라면서 왜 1년 반을 내리 야간 근무만 하게 됐는지 궁금하신 분이 있을 것이다.
하소연하는 입장에선 바보 같은 말이지만, 사실 그 책임은 대부분 나 자신에게 있다.
해당 프로젝트는 분기 별로 성과를 측정해 앞사람부터 순번대로 쉬프트 선택권을 부여하는 철저한 경쟁 시스템이었다.
나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늘 남들보다 더 열심히 업무를 공부했고 그래서인지 높은 성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연히 매 분기마다 쉬프트 선택에 있어 우선권을 가져갔다.
그러면 야간이 아닌 아침이나 중간 쉬프트를 선택하면 되는 것 아니었겠는가?
맞다. 그런데 그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 내 팀 동료들의 상황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외국계 특성상 나이 성별 등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우리 팀에는 다수의 중년 분들이 계셨고, 젊은 직원들 중에도 여성이 절반 이상이었다.
고민 끝에 몸 건강하고 책임질 사람 하나 없는 싱글남이니 내 조그마한 희생도 팀원들에게는 큰 세이브가 될 것이라는 '순진한 의협심'으로 야간근무를 자청했던 것이다.
그때 무슨 자아도취에 빠졌었다던가 굳이 멋있는 척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다 같이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완벽한 판단 미스 (Mistake)였다.
인간이 한없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심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직장이다.
자신의 밥줄, 곧 생존권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알고 보니 아침과 중간 쉬프트에 있던 인원들은 그 쉬프트를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성과를 조작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팀 리더와 기타 매니저들도 상주하는 근무시간이므로 이슈가 발생해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그 건을 대충 무르고 넘어가는 식도 많았다.
즉 내가 좋은 의도로 배려하고자 했던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에 임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에 혈안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정면승부로는 능력이 부족하니 편법까지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야간근무 중이던 나는 그러한 상황조차 모른 채 1년 반을 보냈고, 이윽고 몸의 한계를 느낄 즈음에야 알아차렸다.
결과적으로 내가 조용한 사직을 하게 된 이유는 위와 같은 일들로 인해 동기부여를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일을 손에 놓은 것은 아니다 (월급은 받아야 하니까).
단지 예전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먼저 나서서 팀원들을 서포트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이제 그런 건 없다.
대신 내 것에 해당되는 일만 딱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끔 하는 중이다.
팀원들도 내 태도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런 거 이제 거의 안 한다.
대신 취미생활에 집중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어보고 있고, 태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투자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고 이렇게 브런치 글도 쓰고 있다. 주말에는 탈모 케어를 받으러 시내에 나가고 정기적으로 축구 모임도 하고 있다.
덕분에 삶의 질이 많이 개선되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흔히 사회생활은 "늘 공과 사를 구분하라."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공 (Public)'과 '사 (Private)'의 형태와 범위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제아무리 일로 만나는 관계일지 언정 나의 '사'를 조금이라도 발휘하여 적정한 배려나 희생은 하는 게 맞는 거라고 믿어왔었다.
그 이유는 어릴 때부터 내 부모님으로부터, 또 특히 내가 다녔던 대학으로부터 "조금 손해 보고 살아도 괜찮다. 더 크게 돌아온다."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일련의 경험들로 인해 지금은 내 기준을 수정하는 중이다.
이제 일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더 이상 나의 '사'를 끌어오지 않을 생각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이제부터는 시키는 일만 하려고 한다.
흔히 사회생활, 특히 직장생활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씁쓸한 말이지만, 남을 배려한다고 해서 그 사람도 나중에 나를 배려해 줄 거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나의 배려가 자칫 그 사람의 이기심에 더 큰 불을 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