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완의 모든 장치적 연출의 극대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컨저링 1>을 2013년에 접했을 무렵. 나는 공포영화의 신기원(新紀元)을 보았다. 일상적이고 가장 흔하게 비칠 우리의 주변에서,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컨저링>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복선을 깔고, 그 복선이 아주 자연스러운 '계기'에 의해 연속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공포라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무서움이 생기고, 그 공포가 배가 됨을 제임스 완은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쏘우>에서도 고립된 상황이 만들어낸 절박함이 무엇인지를 너무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겠다. 사실 공포영화의 경우는 관객이 '인물'이 표현해내는 일련의 감정선, 감정에서 일어나는 표정에서 대체로 몰입하게 되는데 제임스 완의 경우는 <쏘우>, <컨저링>에서 보여주었다시피, '공간성'에서 공포성을 배가시킨다. 즉, 사람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 미친 상상력은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깊은 공포감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멋지게 표현해내고 있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큰 기대는 없었던 작품이 맞다. 기존의 1편이었던 <애나벨 2014>의 경우 너무 연출적 장치가 뻔했기 때문이다. 공간성이라는 개념보다는 기존의 공포영화가 가지는 일련의 공식적인 연출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무섭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니까, 기존의 <컨저링>의 유명세를 뒤에 업고 개봉한 그저 껍데기만 요란했던 영화였다. 그렇기에 후속 편으로 나온 이번 영화 역시 별 볼일 없을 것으로 여겼다. 적어도 제작 참여에 제임스 완이라는 이름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더군다나 관객에게 호평을 받은 <라이트 아웃 2016> 감독의 경우 연출이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애나벨>보다 괜찮을 것 같다고. 그렇게 믿었다.
개봉한 지 단 하루 만에 혼자 보면 안 되는 영화가 되었다. 그만큼 공포의 몰입도가 기존의 <애나벨>보다 깊이가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작에 대해 너무 실망이 컸기에 이번에는 조금은 나아졌으리라 그렇게 믿었다.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는 한 인형 장인의 부부 집에 딸인 '비 멀린스(통칭: 벌꿀)'가 있었는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이 부부에게 어느 날 끔찍한 사고로 딸을 잃게 된다. 12년 후, 부부의 집에 고아원의 수녀와 아이들이 들어오게 되고 일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그렇게 인상적인 느낌을 주진 않는다. 가장 있을 법하고, 주변에 일어날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아주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할 법한 각본으로 영화의 시작을 연다. 물론 이 시작 단계에서 깜짝 놀라는 부분이 두어 번 자리하지만, 본 게임에 들어서기의 가장 간단한 애피타이저에 가깝다.
무척 넓은 집에 들어온 어린 '린다'와 몸이 불편한 '재니스'를 비롯한 발랄한 소녀들은, 처음으로 교회에서 벗어난 대저택이기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들떠있다. 이 마음을 표현하는지 영화의 음악도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공포영화가 그렇듯, 전반을 너무나 밝은 배경으 묘사했을 때. 대체로 그 끝이 매우 어둡다. 시퀀스에서 비치는 각각의 입장들이 너무 밝기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 너무 걱정이 앞섰다. 저 밝은 기운에 의해서 어둠이 봉인된 무언가를 깨우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무뚝뚝한 아저씨 멀린스의 반응 역시 그랬다. 행복을 바라던 부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으며, 웃음도 생기도 없었다. 아울러 그의 아내였던 멀린스 부인은 너무나도 베일에 가려있었다. 어쩌면 불행의 씨앗은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하지 않을 때 드러난다. 어쩌면 감독과 제임스 완은 설명의 생략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불안감을 보다 증폭시키기 위해 일련의 소통적인 연출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인물들의 소통의 부재는 아이의 '호기심'에 의해 모든 사건이 시작되게 된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몸이 불편한 아이 '재니스'는 큰 저택에 들어와 신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몸이 불편하여 마음껏 뛰어놀지 못한다. 이 부분을 잘 알고 있는 '린다'는 저택에서 조금은 우울해하는 재니스를 생각해 나가지 않고 남아있겠다고 말하나, 재니스는 자신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해달라며 린다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나가 놀기를 권한다. 이후 등장하는 애나벨의 연출은 재니스를 배려하는 '벌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재니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처럼 옆에 짚고 다닐 지팡일 놔두고 사라진다. 사실 이 장면은 '배려'라고 말했지만 결국은 악마가 재니스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몸이 불편해 놀고 싶더라도 나가 놀지 못하는 현실에서, 애써 지팡이를 짚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힘껏 창문으로 걸어간 재니스를 보노라면, 적어도 자신의 힘으로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작고 아름다운 노력을 악마는 지팡이를 보여주며 "넌 계속 지팡이를 들고 다닐 신셐ㅋㅋㅋ"라는 조롱을 한 격이다. 이때부터 재니스는 애나벨이라는 악마의 타겟으로 지정되었고. 지속적인 '유혹'에 노출되게 된다.
이후 애나벨은 멀린스 부부의 딸인 '벌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쪽지를 건네고 자신이 봉인된 곳으로 호기심을 자극해 유혹한다. 멀린스가 이 방은 닫혀있는 방이라며, 재니스의 호기심을 1차적으로 막아서지만, 무방비상태의 밤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억제할 방법이 없다. 재니스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호기심에 의한 행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꿈과 호기심은 밤에 드는 잠을 통해 창의적으로, 진취적으로 발현됨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을 악마는 제대로 찌르고 들어갔다. 재니스의 호기심을, 궁금증을 깊게 파고들어가 멀린스가 닫혀 있어야 한다는 문을 열게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악마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이 아주 긴장되고, 이때쯤 나올까 하는 의문형을 자극하기 위해 아이들의 주변에만 아주 작게 드러난다. 낸시와 한 소녀의 밤중의 대화를 놀래켜 조롱하고, 샬롯 수녀 방의 다락 통로를 고의적으로 열어 수녀를 조롱한다. 이후 첫 번째 타겟인 '재니스'에 빙의를 시작으로 '샬롯'수녀와 '린다'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죽음을 맞이하게끔 하려고 든다. 이 과정에서 멀린스와 멀린스 부인은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남은 것은 빙의된 제니퍼를 제외한 샬롯 수녀와 린다, 그리고 소녀들이었다.
*특정 상황에서 호의로 비치는 부분이 있긴 했으나 결국은 악마는 악마였다.(결국 악의 문제)
악마의 난동, 악마의 전능한 능력이 담긴 칼부림에 의해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 운명에 처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각각의 작은 '협력'으로 악마에게 대항한다. '샬롯'수녀와 '린다', '낸시'를 비롯한 남은 소녀들의 협력으로 위험에 처한 한 소녀를 창고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벌꿀의 방에 고립된 린다를 샬롯이 구해낸다. 이는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힘이더라도, 작은 기적과 같은 힘으로 악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기에 몰린, 급박한 상황에 치우친 부분에서 작은 힘의 대응이라는 극적 연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빙의된 재니스를 구해내지 못했으나, 남은 이들이라도 구해낸 부분에서 안타까움을 느낌과 동시에,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가슴을 졸인 시간이 끝이 났다는 안도감이 왜 이리 기뻤는지 모른다. 정말 긴박한 시퀀스가 반복되다 보니, 보는 관객은 영화의 러닝타임이 소모될수록 진이 빠지며 기력이 소모된다. 그만큼 몰입도와 연출의 박자감이 꽤나 빼어남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소녀들이 멀린스 부부의 대저택에 타고 온 차를 타고 떠나려는 찰나에 교회의 은총에 의해 멀린스 부부의 집이 정화되었고, 이윽고 애나벨 인형을 든 신부님이 아이들을 향해 "이거 가질 사람"이라고 말했다, 겪어보지 못한 이의 돼먹지 못한 농담에 혀를 차게 만들었다. 내가 저 소녀들이었다면 신께 기도를 한 후 신부를 한 대 쳤으리라. 이윽고, 경찰들이 빙의되어 사라진 재니스를 찾아봤으나 온데간데없었다. 사라졌다는 소식과 더불어 소녀들이 떠나는 부분을 끝으로 시퀀스가 변화를 맞이하자, 한 고아원에서 재니스는 애나벨이라는 이름으로 진짜 애나벨 인형을 든 채 등장한다. 이쯤 되면 다음 후속작으로 워렌 부부가 나오는 애나벨이 개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을 가감 없이 말하자면 무서움'4', 답답함'6'이 아닐까 싶다. 솔직하게 조금 답답했다. 물론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라는 장르답게 무서움은 있었으나 일련의 시퀀스에서 나타나는 재니스의 행동과 행동에 따른 연출은 지극히 '억지적인 호기심'이 담겨있었다. 악마의 유혹이 있었다고는 하나, 문이 닫혀있는 곳, 계속 닫혀 있어야 할 곳을 재니스가 멀린스 부부의 허락 없이 들어간 데다. 그곳에서 린다와 더불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만진다. 소위 말해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있는 재니스, 린다를 보면 아이라는 부분의 설정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 스스로 위험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나친 호기심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은 답답함이 있었다.
물론 시나리오 상의 흐름대로라면 '필연'의 계기, 상황을 만들어낼 '원인' 이 두 가지의 요소가 필요하기에 부득이한 과정이지만, 과도한 호기심의 연출은 조금은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어린이들의 호기심은 순수하거나 혹은 악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냄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컨저링>, <컨저링 2>에서는 이런 부분이 없이 자연스럽게 공포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재니스와 린다의 연출적 장치만 제외한다면 사실 군더기가 없다.
각본, 연출, 음향 삼박자 모두가 맞아떨어지면서 짙은 몰입도와 긴장을 지속시키는 박자감이 꽤나 일품이다. 앞서 억지스러운 호기심의 연출만 제외하고 보면, 연결되는 각본의 힘이 극의 후반부에 와서 정점을 찍는다.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연계적이고 폭발적이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그간 보여주었던 모든 장치들의 완성품이 아닐까 싶다. (이와 중에도 새로운 시도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기존에 보여주지 않았던 우물, 복층구조를 잇는 통로, 좁은 방 등을 표현했다. 사실 좁은 구조에서 얼마나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커 보인다. 폐소공포증(밀실 공포)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이전 작품의 복선, 앞으로 드러나게 될 작품들의 복선, 이렇게 끝나는가 싶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애나벨1>로 귀환하는 일련의 각본은 진짜 소름이 돋는다. 영화의 '연출'에 공포를 느낄지언정, 소름은 돋지 않았으나. 끝에 다다르러 '각본'이 보여주는 흐름과 마지막 시퀀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프리퀄 속의 프리퀄'을 보여준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이는 그간 <컨저링>, <애나벨>을 본 관객이라면 공감을 충분히 이끌어 낼 것이 자명하다. 올여름 가장 인상 깊은 공포영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애나벨 하나만 봤지만 말이다.
한 줄평: 위험한 일은 때론 우리의 '욕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