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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이 가치 있다.’
싯타르타 말의 반론.....

by 정강민

헤르만 헤세의 <싯타르타>에 부유한 상인과 싯타르타의 대화 장면이다. 금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상인 : 금식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요?

- 싯타르타 : 큰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금식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금식을 몰랐다면, 저는 오늘날 먹고 살 일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과 함께든, 혹은 다른 곳에서든. 왜냐하면 배고픔이 나를 부채질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처럼, 나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나는 조급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으며, 오랜 시간 배고픔을 멀리하고,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금식이 큰 가치가 있다고 싯타르타(부처)는 말하고 있다. 진짜 큰 가치가 있을까? 왜 가치가 있을까?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기 때문에, 고통을 견디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소식하는 것이 몸에 좋다는 과학적 증거도 없었을 것이고, 소식은 금식은 아니다.

금식은 먹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먹지 않아야 금식인가?

마지막 문장 ‘오랜 시간 배고픔을 멀리하고,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에서 싯타르타의 우월성을 표현 듯 하다. 근데 여기서 ‘오랜 시간’은 ‘영원히’는 아니다. 결국은 먹는다는 의미다.


그럼 금식의 기준은 무엇인가? 3일을 먹지 않는 게 금식인가?, 5일을 먹지 않는 게 금식인가?, 10일을 먹지 않는 게 금식인가? 어떤 사람은 하루를 먹지 않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다. 이 사람에게는 하루를 먹지 않는 것도 금식이 아닐까?

금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결국 싯다르타도 먹었다.


먹지 않는 것 자체가 가치가 될 수 없다. 가치가 되려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 가치가 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먹고, 자고, 움직이고, 사랑하는 것은 본능이다. 이것을 안 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되지 않는다. 가치가 되려면 싯타트타가 자기 것을 먹지 않고, 그것을 주변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주었다면 큰 가치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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