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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Nov 20. 2020

넌, 어디서 왔니?(下)

그릇 이야기

물 건너왔다지만 워낙 싼 가격에 별생각 없이 산 접시라 과일을 담는 것도 아닌 과일 깎는 접시로 사용했다.

멍 때리는 시간은 발견의 시간이다. 식탁에 앉아 하릴없이 멍 때리던 어느 날, 온통 푸른빛이라 그림이 돋보이지 않았던 접시 속 풍경이  솔깃해진 이야기처럼 눈으로 들어왔다. 산과 강, 오래된 성이 있는 마을 입구쯤에 성 주인쯤 될 것 같은 남자가 머플러를 휘날리며 사슴, 염소 같은 초식동물이 노니는 길을 따라 들어서고 있다. 모퉁이 돌아 샹그릴라쯤 되는 곳인가. 뒤집어 보니 당장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 Burgenland' 다. 검색에 들어갔다. 부르겐란드는 오스트리아 동남부에 있는 지역으로 실제 존재하는 곳이었다. 독일산 접시에 오스트리아 풍경이 있다? 호기심 만발해지며 접시 브랜드 로고로 보이는 동그라미 안 글자를 검색해 본다. VILLEROY& BOCH, 이 글자들을 넣자마자 '빌레로이 앤 보흐'라는 회사와 쇼핑몰, 많은 빈티지 물건을 취급하는 블로그들이 쫘아악 떴다. 세상에, 이렇게 유명회사 제품이었어...


빌레로이 앤 보흐는 독일 생활 도자기 브랜드로 1748년 프랑소아 보흐와 그의 세 아들이 세라믹 제조를 시작으로 지금에 이른 오래된 회사였다. 우리나라 어느 집에나 보편화되어있는 한국도자기, 행남자기 그릇처럼 독일 가정에서는 이 브랜드가 그런 위치쯤 되려나. 요즘은 프랑스 민속화가 라플라우의 그림을 접목하여 전 세계 찻잔 애호가들의 워너비 명품 브랜드가 된 것 같기도 하던데. 아무튼 알지도 못하고 사온 파란 접시는 이 회사 부르겐란트 시리즈 중 하나로 1960년대 생산되다가 단종된 것으로 접시 외에도 같은 색깔의 다양한 디자인이 있는 걸 보니 한때 유행했던 시리즈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던 그 접시가 우리나라 앤틱 시장에서는 고가로 팔리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막 쓰던 접시가 좀 새롭게 보이긴 했지만 찬란한 족보를 알게 되었다고 고이 모셔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멀리서 온 오래된 물건일수록 생활 속에서 빛나게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모름지기 생활집기는 유용하게 많이 써주는 게 미덕이니.


고향집 찬장을 열어 볼 차례다. 거의 방치된 마루 한켠 먼지 쌓인 작은 미닫이 유리창을 열자니 안 열은 세월에 시위라도 하듯 뻑뻑하다. 앞으로 쏟아질까 조심해 천천히 열어보니 낯익고도 낯선, 빛을 잃은 그릇들이 질서 없이 칸칸에 들어있다. 낯익은 이유는 유년 시절 기억이 살아나 그렇고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낯설었다.

가져가고 싶은 거 가져가도 돼?

뭐 볼 게 있다꼬!

늘 하는 엄마식의 투다. 볼 게 항상 있더라고요.

어지러운 데서 골라낸 브랜드 없는 이 접시들에게 일명, 시골 오일장 컬렉션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소꿉놀이 그릇도 아니고 손바닥보다 작은 이 조잡스러운 그릇들은 전국 어느 빈티지 가게에서도 볼 수 없는, 1970년대 오로지 내 고향마을 시골장 난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릇들이니 말이다.


엄마, 이 그릇들은 어떻게 사 모으게 됐어? 그릇에 별로 관심 없잖아...

그릇 안 좋아하는 여자 있나.... 나도 한때는 좋아했어. 너희 아버지가 생활비를 쥐꼬리만큼 줘 저기 찬장에 있는 게 다지, 내도 사고 싶은 게 있었거든. 저것도 반은 계란 팔아 산 그릇이야. 지금 생각하면 미쳤지! 미쳤어! 집에서 낳은 계란 몇 개나 된다고 그걸 자슥들 안 멕이고 돈으로 바꿔 저 그릇들을 샀으니...쯧쯧. 고기도 많지 않은 세상이었는데 계란이나 푸지게 먹이지, 나 참! 근데, 장날마다 한 개씩 사 모으는 게 재미가 나더라고... 쪼꼬만게 이쁘잖아.

진짜, 왜 이렇게 접시들이 작아? 반주깨미 그릇도 아니고...

그때 시골에는 개다리소반으로 독상을 많이 차렸잖아. 아버지상, 할머니상, 일꾼상, 또 손님 오면 손님상... 작은 그릇들이 많이 필요했제. 또 며느리 보면 새색시상이란 걸 차려주는 풍습이 있어 니 오빠들 장가보낼 생각에 딴엔 이뿌다고 산거야. 와? 보기에 괜찮나? 쓸만하면 가져가. 내가 지금 가지고 있어 본들 뭐 하겠나...


그래서 형제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안 가져가면 엄마가 서운할 뻔했던 그 작은 접시들을 들고 왔지만 너무 작아 이리 빠지고 저리 빠져 제법 많이 잃고 겨우 몇 개 남았다.


월은 먹었으나 귀한 본새함부로 세상 빛을 못 보고 그릇장에서 이제나저제나 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찻잔, 한때는 인기가 많았으나 퇴물이 되어 거리에 팔려 나온 접시, 근본은 없으나 실용적으로 잘 쓰이다 한순간 찬장에 갇혀 잊힐 뻔했던 꼬마 접시들, 모두 요즘 우리 집 식탁에서 숨 쉬고 있는 과거로부터 온 쓸모 있는 그릇들이다. 일반적인 명품의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지만 정품명품으로 부르고 싶은 이 물건들은 비슷한 또래 주인과 오늘을 살고 있다. 

부주의한 주인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위태롭지만 쇼윈도로 지루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사는 동안 사랑받고 쓸모 있게 만들어 주는 주인 덕분에 고향 다른 우리들이 여긴 살만한 곳이지. ~오래된 그릇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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