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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May 24. 2021

욕망이란 이름으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

일곱 살 차이임에도 언제나 절친인 니은 언니랑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어떤 유튜브 방송을 소개하는 언니 목소리에 살짝 흥분이 묻어난다. 은퇴 후 정원을 가꾸는 사람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남은 인생도 정원을 가꾸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을 ‘욕망’이라는 단어로까지 표현했다. 정원을 가꾸고 싶은 욕망… 언니의 현재를 알기에 그 단어의 느낌이 왔다. 누군가에겐 정원을 가꾸며 사는 일이 소망, 희망 정도라면, 또 이미 일상이 되었다면, 니은 언니에겐 욕망이 될 수도 있겠구나.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히 바라는 것! 마음먹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 더욱 간절해지는 것.


두 번의 수술과 암투병은 예전의 몸과 마음을 많이 잃어버리게 했다. 집 생활이 최선일 정도로 사그라던 몸 기운은 언니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편견 없는 마음으로 자기의 세계를 단단히 쌓아가던 언니, 애송이였던 나를 두려움 없이 자연 속으로 이끌었던 언니는 이제 집에서 바느질로 소일하며 만족하고 있다. 어느 날, 언니는 숲 속을 기운차게 다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꿈속의 일처럼 자신이 낯설다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언니가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것 같아 난 한없이 쓸쓸해졌다. 아니면 언니가 나를 부르는데 내가 돌아보지도 않고 숲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것일까. 가끔 숲에서 전화하면 무섭지 않냐고 언니는 늘 걱정을 한다.


그런데 오늘 욕망이란 단어를 써가며 강렬하게 올라온 정원 가꾸기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다니, 예전의 언니로 돌아온 것 같아 반갑고 고마웠다. 그래, 언니는 그런 사람이지. 충분히 그럴 사람이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우선 근처 아파트 정원부터 가꾸고 싶다 했다. 사실은 이미 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에 나오는 미스 럼피우스가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루핀 꽃을 심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언니도 ‘아주가’ 란 보라색 꽃을 심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시작된 그 꽃이 벌써 주변 화단에 꽤 많이 번졌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지피 식물로 번식력이 강해 해마다 퍼져나갈 보라색 물결이 벌써 넘실대는 듯하다.


니은 언니의 욕망에 공감하며 나에게도 그런 욕망이라 부를만한 무언가가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지금껏 살면서 단기로 부린 열정 비슷한 건 있었지만 희망, 소원, 꿈… 같은 것이라곤 가져본 적 없는 삶이었기에 거기에 더한 욕망이란 단어에까지 이를 일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지난번 글을 쓰며 ‘글쓰기’에 관한 한없는 내 욕망을 보았다.


딱히 현실감각 없는 내 브런치 글쓰기는 자본주의 논리, 효용의 가치로 따졌을 때 어쩌면 무용한 일에 해당되는데 그것을 자주 쓰지 못해 안달하고 잘 쓰고 싶어 안달 난다. 도대체 무엇을 쓰고 싶기에? 생각해보니 나름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 담백하나 다정한 생활글, 감성과 지성이 적당히 어우러진 책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심플하면서도 읽는 이가 그곳의 공기를 잔잔하게 느낄 수 있는 깔끔한 여행기, 를 쓰고 싶다. 글에 대한 나름의 이 기준은 순전히 다른 글을 읽으며 느낀 감과 폭으로 정해진 듯하다. 누군가 인정해줘도 좋지만 스스로 정한 기준에 만족하는 글, 표현하고 싶은 장면이나 이미지가 내 손놀림으로 펼쳐질 때 세상은 내 것이 된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처음 스스로 계획한 섬섬한 여행을 다녀오고 그 여행기를 남기고 싶어 도전한 일이다. 브런치 북 하나 만드는 것이 시작이자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도 이렇게 쓰고 있다. 기록에 가까운 지루한 여행기를 썼지만 언젠가는 좀 달라질 여행기를 쓰고 있을 그 시간을 떠올리면 작은 설렘이 올라온다. 지금 쓰고 있고 앞으로 쓸 수 있다는 건 자발적 족쇄이자 무한한 자유다. 누군가를 향해 쓰지만 사실은 오롯이 나를 향해 쓰는 이 시간, 내가 욕망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글 발행 후 신문 칼럼에서 글쓰기의 또 다른 의미 하나를 발견했다. 플랫폼에 글을 쓰며 조금씩 달라지는 내 모습과 주변 작가님들 이야기 같아 옮겨본다.

<누구나 작가 되는 세상>, 5/25일 경향신문, 최서윤 작가

온라인 플랫폼의 진화와 확산이 작가의 탄생과 발견을 더욱 쉽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는 일은 사회에 이로울 수 있다. 수신자의 마음을 흔들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진부한 시선을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편견은 진부하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편견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쉽게 재단하지 않으며 맥락을 살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좋은 작가를 위한 노력은 좋은 시민이 되는 노력과 닿아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가 좋은 시민이 되는 노력과 닿아 있다니, 그렇지, 글쓰기로 삶을 가꾸는 시민들 사회가 건강하지 않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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