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느낌
일요일 새벽 5시다. 금요일 저녁에 애틀랜타에서 귀국했다. 딱 12시간의 시차가 있던 파타고니아에서 3달 이상을 머물다 왔으니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새벽에 눈뜬 것이다. 주섬주섬 롱패딩 만을 걸치고 동네 사우나로 향했다. 아직 일출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영하 14도라는 혹한의 날씨에 길에는 아무도 없다. 실존의 엄숙함이 느껴진다. 내가 살아 있다는 이 느낌 좋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글 것을 생각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
항공사의 기장과 부기장 같은 조종사란 직업을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실제 근무하는 시간도 많지 않고, 급여도 괜찮고, 세계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도 있어서 한 번 사는 인생의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시차적응 같은 것이 젊을 때는 별거 아니다. 그렇지만 나이 들면 유럽이나 미주를 오고 가며 겪는 시차적응이 쉽지 않다. 하물며 시차적응되고 나면 다시 비행기를 몰고 와야 한다. 그리고 또 시차적응을 해야 한다. 인생의 반을 시차적응에 쏟는 인생인 것이다.
애틀랜타에서의 귀국길은 15시간 20분이다. 전후 공항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을 빼고 말이다. 좁은 좌석에 앉아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 정말 길다. 유튜브 오프라인에 저장해 둔 영상을 보는 것도 세 시간 정도다. 눈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F1'이 여기저기 모니터에서 돌아가지만 영화를 볼 마음이 1도 생기질 않는다.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든지 잠들기를 노력해 보지만 가슴이 요동친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가슴이 오히려 답답해온다. 인천까지의 잔여 시간이 4시간이 되었을 때, 가슴이 체념했는지 일순 평화가 찾아왔다. 4시간이면 인천에서 필리핀까지 날아가는 시간이다. 아직도 그렇게 많이 남은 것이건만 무려 11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다.
이렇게 긴 시간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시간은 진정 인생을 살아내는 시간이다.
대한항공의 기내잡지를 폈다.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브루스 채트윈.' 3달 동안 들고 다닌 책이 브루스 채트윈의 'In Patagonia'였다. 영어 원문이라 몇 번 펴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Man's real home is not a house, but the road." by Bruce Chatwin.
인간의 진정한 안식처는 집이 아니고, 길 위다.(재거니 역)
브루스 채트윈이 파타고니아 방랑을 마치고 귀국하는 내게 전하는 말로 딱이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몇 번을 다시 읽으며 파타고니아를 떠올렸다. 파타고니아의 구석구석을 버스 타고, 비행기를 타고, 렌터카를 운전하며 돌아다녔다. 가슴 벅찬 순간들을 박제하기 위해 엄청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가슴 벅찬 순간이 많았다는 것이다.
파타고니아가 워낙 넓은 지역이라 2박 내지 3박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동을 했다. 이동을 하는 날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을 자주 마주한다. 2박은 좀 아쉬워, 3박 이상을 선호했다. 그렇지만 별 볼 일 없는 곳에서 4박을 하게 되면, 3박 후에는 좀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똑같은 뷔페식 아침식사를 4번이나 하는 것은 지겹다. 앞으로의 방랑길은 항상 3박을 예약하고, 더 머물고 싶으면 숙소를 변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리가 떨릴 때 떠나면 늦다. 가슴이 떨릴 때 여행을 떠나라.'
시차적응 하고 나니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다시 떠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