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올로 지내는 어머니는 부처님오신날은 서울로 오신다. 오랫동안 다녔던 절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다니는 절과 우리집 인연은 상당히 깊은 편이다. 절의 주지스님이 동생 중매를 하여 동생 부부는 잘 살고 있다. 어머니와 사부인 어른이 같은 절을 다니는 셈이다.
산중의 사찰은 아니지만 비구니 스님들만 계시는 꽤 오래된 도심 속 절인데 바로 맞은편에는 내가 다니는 성당이 있다. 서로 이웃인 사찰과 성당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서로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내건다.
우리 집은 대대로 불교와 가깝다. 고흥군 나로도 ‘봉래사’라는 조계종 산하 사찰 주지스님이 친척 할아버지였다. 나로도에는 외가도 있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까지 방학이면 여행을 하곤 하였다. 지금도 그 봉래사 법당에서 한여름 밤을 지냈던 고요한 기억이 생생하다. 어릴 때는 법당이 무섭기도 하였다.
고요한 고향 시골에서 지내는 어머니는 사경(寫經)이 습관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 쓴 사경 노트가 백 권은 넘을 것이다.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송광사나 선암사와 같은 유명 사찰들이 있기는 하지만 노구를 이끌고 홀로 다니기에는 무리여서, 당신 신앙생활은 늘 사경 중심이다.
집안의 불교적 분위기와 달리 가는 내게, 어머니는 한 번도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 당신 둘째 딸이 교회를 다녀오다 음주 운전자에게 뺑소니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어도 어머니는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어머니 신앙을 존중해드린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허정거리며 세상을 살아온 내게 가장 큰 힘은 신앙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련을 신앙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희망을 가졌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이따금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할 수 있었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이따금 행복과 기쁨과 웃음을 맛볼 수 있었고, 불현듯 고개를 쳐드는 극단적인 생각들도 잠재울 수 있었다.
1년 전 ‘자비출판’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내 나름대로 숨겨 둔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출판사 운영에 관심 있는 이들이나 책을 출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 자비(自費)출판을 자비(慈悲)출판으로 이해를 한 것이다.
어머니의 자비
-이재욱
어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은 절이다
처마 끝 풍경이 울리고
카세트에서 독경이 흐르고
당신은 틈틈이 사경(寫經)을 한다
아침이면 길고양이들이
어머니의 외로움을 탁발해 간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
아들은 화살처럼 기도하고
어머니는 화살 맞은 가슴처럼 기도를 한다
사경 책상에는
아들이 쓴 책 '자비출판'이 놓여있다
일 년 사이 사경 노트 수권이 늘었다.
수정액으로 고쳐가며 쓴 사경의 행간마다
아들의 출판사는 어머니의 가슴을 탄다
책이 나왔을 때
어머니는 스님께 먼저 드렸다
책이 잘되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을 것이다
뭐 하러 스님한테조차 드릴까
아들은 자비출판이 성에 안차는데.
자비출판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는
책 제목을 자비(慈悲)출판으로 알았다
출판사가 저자에게 자비만 베풀면 망하는데
어머니는 오늘도
자식의 자비(慈悲)출판을 위해 사경을 한다.
부처님오신날인 내일이 하필 일요일이다. 아침부터 어머니는 절로, 나는 성당으로 가게 생겼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자식들을 위해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는 연등을 주렁주렁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