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없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며, 개인에게 있어서도 손실이다.
개인의 신념이 왜 개인에게 유리한 도구이며,
어떻게 국가의 발전에 상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필자의 사소한 생각들을 담아 적었다.
부제에서 드러낸 결론이긴 하지만
신념이 없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며, 개인에게 있어서도 손실이다.
이 글은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각종 문제를 언급하며
개인의 신념 유무의 관점에서 문제 발생의 원인을 말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를 쓴 이의 생각을 담는다.
동시에 신념이 그다지 거창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 스펙, 취업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은 영역에서 동일한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이상향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목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초, 중, 고등학교 시절엔 좋은 성적, 대학이라는 동일한 수치와 이름을 이상향으로 여긴다.
오직 1등급만이 좋은 것이며, SKY카포 등의 이름은 신성시되어 인생의 판가름은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는 것 마냥 취급된다.
대학에 오면 이상향은 또 한 번 바뀌어
좋은 '학점'이 되고, 좋은 대외활동, 인턴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종점은 '취업'에 있다.
물론 취업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은 필수적이고,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를 벌어들이는 가장 체계적인 방법은 취업을 통한 수입원 확보이다.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자연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지배받는 동물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문명을 이루어낸 인간이라는 종을 말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다만,
그 종점이 (어찌 보면 인생의 종점이) 취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공부하는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 자살, 4포족, 출산
단일 우상 숭배의 결과로 우리는 과도화된 경쟁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게 되면 경쟁이 치열해지기 마련이다.
맹목적성은 강력하다.
남들이 다 하는데 나는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은 불안해진다.
뒤처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다수가 하는 것이라면 의문을 가지지 않고 달려든다.
어느새 그것은 사회의 중요한 축이 되며,
처음엔 미미한 영향력을 가졌을지 몰라도 어느 순간이 되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우상이 된다.
맹목적성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과도화된 경쟁 구조는
블랙홀과 같다. 빠져나올 수 없다.
때문에 수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한다.
자살, N 포족, 출산의 감소
이 3가지 주제의 공통된 포인트는
첫째,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것
둘째, 그 사회 속에서 나의 상황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되는 문제라는 점이다.
(*자살의 이유는 당연하지만 여기에선 특정 상황만을 가정한다.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다)
나의 상황이, 나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어느 것이든 유지할 의지가 사라진다.
이것을 해결할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이 한곳으로 모이는 현상을 해결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일 숭배의 현상을 깨닫고 그것을 깨어 부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이 무엇을 믿고, 그것을 행할 의지와 또 그것을 응원할 사회에 달려있다.
필자는 이것을 개인의 신념과 그것을 존중하는 사회의 모습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 빠른 소비문화, 빠르게 변하는 콘텐츠
오늘날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가히 '정보의 홍수'라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많은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은 다양한 것들에 노출되며 밀도 높은 정보의 흡수를 '당하고'있다.
정보의 홍수는 언뜻 보면 좋은 의미로 들린다.
실제로 2010년대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하였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흔이 오가는 말은
"이제 지구 반대편 소식도 순식간에 알 수 있어"였다.
오늘날엔 정보의 홍수는 오히려
답답하고, 너무 빠르고, 과도한 이미지를 지닌다.
우리가 이러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에는 아마도
콘텐츠의 과도함이 가져다준 피로감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피로감은 일상에서의 제대로 된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말 그대로 '피로'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의 가장 최신의 형태인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와 그에 따른 대중의 소비문화는
본능에 충실한 문화이다.
인간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게 뇌의 보상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콘텐츠와 소비 시장은 이러한 인간의 도파민을 자극하기에 아주 좋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빠른 문화가 사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라 생각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빠른 소비문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쌓인 대중의 피로감과, 그로 인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의 감소에 있다.
인간적 상호작용은 매우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
좋은 예시로,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다녀오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특히, 토론에 가까운 상호작용은 더욱이 더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
토론과 가까운 인간적 상호작용은
"경청하기 위한 신경의 곤두섬,
적절한 반응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한 사색"
따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꽤나 큰 품이 드는 작업이다.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토론과 합의의 도달이 필요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그러하듯,
수많은 다양성(토론의 발제)이 높은 확률로 인류 발전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고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토론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
그럼에도 토론은 중요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오류를 만들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발전해 온 이유는 바로 그 오류를 발견하고,
토론과 합의를 통해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열의 시대에는 온전한 토론과 합의를 찾기 어렵다.
'중용'이라 할 만한 절제와 균형은 극단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되뇌면서 사색할 시간은 사라졌고,
그 사이에 정보는 또다시 밀려오고 있다.
이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분간할 힘은 없고
상대방이 나에게 말한 것의 이면적 의미를 파악하거나
상대에 대한 공감을 할 힘이 없다.
짧은 시간에 올바른 정보를 분간하기 힘들어졌고
결국 사람들은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것이 사라진 것이다.
신념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은 다수가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목매달기 시작했고
그것은 우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1차원적으로 듣자마자 뒤에 들리는 것에만 집중하기 시작했고
때문에 자극되고 편향된 정보에 현혹될 가능성이 커졌다.
개인은 세상에 대한 인정 있는 호기심을 잃고 시민적 감수성이 부족해지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심과 의리를 잃어 실리만을 추구하는 모양새가 빠르게 번지지고 있다.
사회는 분열되었다.
지금까진 신념이 약해진 (또는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이제 신념의 유무가 개인의 인간적 피로감과 사회의 분열을 막을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보겠다.
형이상학적 개념주의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개념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인간은 '환원주의적'인 접근으로 개념화를 통해
무수한 지식의 축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학교 수업 시간에서 모든 과목의 모든 첫 장에서 배우는 것은
"개념"이다.
개념은 앞으로 배울 정보들의 집약체이며,
방대한 정보를 짧은 정보로 잘 요약한 조각이다.
'개념화'를 인간이 잘 활용하는 이유는
많은 부분을 줄이고 효율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대화에 있어 하나의 단어로
무수한 길이의 정의를 줄일 수 있다.
이는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인 지식의 축적과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념'도 개념주의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신념이란
어떠한 생각을 굳게 믿는 것으로
우리 삶의 크고 작은 결단에 있어 우리가 일관된 선택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돕는다.
개념화와 비슷하게 신념 또한
무수한 생각의 고리와 형용하기 힘든 것들을 단순한 조각으로 모은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신념이 가지는 효용성과 파급력은 강력하다.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지 못한 어린이는 맛있는 선택을 위한 고민을 한다. 하지만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어른은 대부분 선호하는 아이스크림이 있다. 고로 아이에 비해 적은 에너지를 들여 결정을 한다.
이건 아이스크림에 대한 개인의 신념이고 선호이다.
단순한 예로 그쳤지만
이것이 더욱 심각한 사안이고, 영향력이 큰 사건이라면 신념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은
빠른 시간 안에 적은 정신적 에너지를 들이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정보를 와 사회의 올바른 토론을 하기 위해 개인은
들어오는 정보에 대한 올바름의 판단, 그리고 스스로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가 자신만의 잣대가 세워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수한 정보와 해본 적 없는 생각의 괴로움에 결국 이해하기를 포기하기에 이를 것이다.
우리가 처음 수학을 배우기 어려운 이유는
그 복잡하고 많은 개념을 모르기 때문이지 않은가?
한 번 그 개념이 머리에 잘 자리 잡히고 나면
그땐 왜 그렇게 어려웠을지 싶을 정도로 우리는 힘든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초등학교 수학을 어렵다고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배웠지만
중학생이 되고 나니 왜 이걸 100점을 못 맞았지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회적 토론과 합의의 관점에서 상대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그 순간이
사회에 합의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개인의 신념이라는 확실한 기준선을 기준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훨씬 쉽게 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어딘가를 기준(신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만의 기준(신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선이 있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기준으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함으로써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최초 이해도가 더 높으며 이것은 차후 정보에 대한 이해도의 성숙에 필요한 에너지를 크게 절약할 수 있다.
또한 충분히 다양한 가치를 느끼고 생각해 본 사람이기 때문에
가치의 다양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주장을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 개인의 신념이 국가적 관점으로 이로운 이유
자신만의 잣대가 없이 서로의 주장을 만나게 되면 드는 생각이
"쟤는 왜 저런 말을 하나"와 같은 생각이다.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기위해 에너지를 사용하기 싫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기에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다.
상호 간 이해도가 적은 에너지로 수행될 수 있다면
토론과 합의는 더 이상 힘들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당연히 그 과정은 여전히 힘들다. 다만 상대적으로 그렇다)
토론이 더욱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더욱 많은 사회적 토론을 시작할 수 있고
이는 확률적으로 더 (발전에) 이로운 선택을 하게 만든다.
: 개인의 신념이 개인적으로 이로운 이유
개인의 신념은 개인적으로도 이롭다.
정확히는 개인의 신념을 가지는 자가 많을수록 이롭다.
개인의 신념을 만든다는 것은
'나만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자신만의 관점, 선호가 있다면
개인이 만들어내는 선택은 분산될 수 있다.
선택의 분산은 단일 숭배의 현상을 완화할 것이며,
과도한 경쟁 사회는 완화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다양한 시각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개인의 신념은, 취향은, 선택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개인은 더 이상 비교 이유도, 경쟁에 밀려 포기할 필요도 없어진다.
(물론 완벽하게 그럴 리는 없다. 과장법적 표현이다)
개인의 관점에선 다양한 시도에 대한 자신감을 보장할 수 있고 혁신의 빈도를 높일 수 있다.
혁신은 더 나은 개인과 사회를 만들고 국가의 경쟁력을 만들어낸다.
국가의 경쟁력은 개인의 자부심과 실질적인 사회적 보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필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단일화된 가치를 쫓는 관습에서 벗어나고, 중용이라는 가치 아래
다양한 신념을 존중하는 사회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필즈상 수상에 빛나는 허준이 교수의 유명한 축사의 한 부분에선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 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필자가 좋아하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선 이런 시절이 나온다.
En: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중략>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Kr: "어두운 밤을 쉬이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죽어가는 빛을 향해 분노... 분노하십시오"
필자는 이 두 글에서 공통된 인상을 받는다.
순순히 물 흐르듯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저항하며, 자신만의 것, 나다운 것을 찾으라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신념을 지켜내는 것은 어렵다.
사회의 기조는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개개인의 헌신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날 때까지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느 순간 이것이 사회의 한 축이 되길 바라며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 안에서 신념을 가꾸고 지켜내는 일을 해야 한다.
사회의 한 축이 되고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축에 올라타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이 정신은 정책으로서 (특히 교육으로서) 뿌리를 내릴 것이고,
그때 우리는 나와 당신의 신념을 존중받는 사회의 초입에 들어설 것이다.
필자가 말해온 신념이란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아주 멋있다고 생각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의외로 놀랐던 것은 자신은 교수가 되리라는 꿈이 있어서 교수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지도 교수님이 분야를 알려주셨고 묵묵히 공부해오다 보니 박사가 되었고 어느 순간에 보니 교수가 되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교수님은 묵묵히 자신의 연구 방향에 대한 자신이 있고, 사회적 시선에 다양한 자신만의 관점이 있으셨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신념이 없음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영웅호걸 같은 삶은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지 않고자 마음먹은 사람들은 모두 신념이 없는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신념은 선택에 필요한 하나의 잣대, 주관이라 하였다.
선택을 함에 있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잣대로 선택을 한 것이고, 행동한 것이다.
필자가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거창한 무언가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선택에, 나의 삶에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혹자는 신념이 고정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택의 잣대가 세월에 따라 바뀌는 것은 신념이 없는 삶인가?
그것은 신념이 없는 삶이라기보다 더욱 유연해지는 삶일 것이다.
유연한 신념이 나의 신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택에 이유가 있고, 그리고 그러한 이유를 위해 노력했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성경의 한 구절로 글을 끝맺겠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 - 티모테오 2서 4장 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