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미러
"저는 에버셀을 맞지 않기로 했어요."
배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요? “
"네이처본에 가입했어요."
나는 그녀를 뜯어말려 볼까도 싶었지만 딱히 말릴 명분이 없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는데 배아가 말을 이어갔다.
"괜찮겠어요?"
상관없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걸리고 말았다. 쉽게 나올 수 있는 질문도 대답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나는 비교적 회피성이 짙은 애매한 대답을 했다.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문득 이 관계를 놓기가 싫다는 욕심이 들었다. 놓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모든 걱정을 잠깐 내려놓고 이 순간에 집중했다. 점점 긴장이 풀렸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재즈 피아노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둘 사이의 공간을 천천히 메우고 있었다. 편안해졌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는 이 공간이 편했고 다른 것들은 신경 쓰기 싫었다. 이 소리가 배아랑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배아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시 귀가 먹먹해졌다.
"술 먹어요. 우리."
"네?"
"술 먹으면서 얘기해요."
배아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때 배아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배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주위가 점점 멍해지고 느려졌다. 모든 공간에는 배아와 나밖에 없는 듯 싶었다. 그래 나는 그냥 이 순간이 그냥 좋은 것 같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외로운 지구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약 백 년 정도는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결국 혼자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문득 그 느낌을 최근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아가 스르륵 스며들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일상에서 그 애를 떠올렸다. 그 애의 시선을 살피는 일은 참 설레었다. 어디를 보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순간에 눈에 총기가 들어서는지, 혹시 너도 나만큼 사랑에 빠졌는지 늘 묻고 싶어졌다. 말보다는 눈이 앞서고 눈보다는 몸이 앞섰다. 술잔은 자주 부딪혔지만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았고,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우리는 그냥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술잔을 다시 부딪혔다. 금세 술잔에 몸이 떴다. 우리는 뷰드럽게 유영하듯 추운 겨울날을 지나 같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서로를 감상했다. 배아의 눈이 풀리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왜 사랑이 늘 완벽하지 않은 채로 시작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해 댔다. 그날 이후로 배아와 나의 관계에는 진전이 없었다. 우리는 최대한(에버셀과 우리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결정을 회피했고 그대로 방치했다.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주에 두세 번씩은 만나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술을 먹고 같은 밤을 함께 보내는 일은 없었다. 나는 대화가 깊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곧 끊어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마지막으로 배아와 밤을 보냈던 날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매일 밤 잠들기 전, 그날을 되새기고파 방안에 누워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질릴 정도로 우리가 함께한 장면만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했다. 이 짓거리를 한지 두세 주 차쯤 접어들었을 때, 클라우드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다.
최근 특정 구간의 기억을 100회 이상 반복한 패턴이 감지되었습니다. 반복된 특정 구간 리캡은 정싱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썩 달갑지 않았지만 납득이 가는 분석이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알림을 보내온 듯했다. 마지막 알림 창을 확인하고 내리려는 순간 멈칫했다.
[업데이트: 알거나 알 수도 있는 사람]
업데이트 태그가 달린 이미지에는 배아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침대맡에 머리를 떼고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고 클라우드 창을 거실에 크게 띄워놓았다. 그리고 [확인하기]를 눌렀다. 클라우드는 배아의 얼굴을 오려 내어 동기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죽여 동기화를 기다렸다. 클라우드는 서서히 타임라인을 만들어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을 트래킹 하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모든 기억들이 타임라인 역순으로 재배열되었다. 앞으로 이렇게 배아를 보면 되겠구나 싶었다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금세 한 달의 타임라인이 완성되어 있었다. 타임라인에는 썸네일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나와 무탁이 뒤엉켜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이미지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외에 배아와 캠퍼스를 거닐었던 날, 내 과거 이야기를 했던 날, 심지어는 처음으로 어플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던 날의 말투와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최근 한 달의 기록이 지나고 우리의 타임라인은 감촉같이 사라졌다. 6개월, 1년, 5년, 그리고 20년 전으로 점점 빠르게 시간이 되감아졌고 마치 진공상태처럼 아무것도 없었던 시공간으로 이어지고 았었다. 우리의 히스토리는 진작에 끝났지만 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되감기 하고 있는 검은 화면을 주시했다.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칠십년을 살았는데, 아무래도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무리인가 싶었다. 타임라인의 되감기가 백 년을 한참 지났을 때쯤이었다.
[150년 전 기록]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아니면 아마 시스템 오류 같은 건가 싶었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른 창들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태그를 다시 확인했다. 배아의 얼굴이 맞았다. 정확히 배아였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빈 잔에 얼음을 가득 담고 위스키를 꺼내 붓고는 떨리는 손을 이용해 잔을 흔들었다. 한 입을 먹고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재빨리 백 오십년 전의 배아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