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 것이 힘이다

by 전명원


한때 우리는 도깨비 여행 전문이었다. 늘 낼 수 있는 시간이 빠듯했으므로 ‘피치 못할 때만 이용한다’는 피치항공을 주로 타고, 자정이 넘은 시각에 주변 단거리 여행지로 떠나곤 했다. 매번 공항 노숙도 당연해서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일어나 이른 아침부터 낯선 나라의 도시들을 부지런히 여행하곤 했다.


벚꽃을 보러 갔던 어느 해엔 자정이 넘어 도착한 하네다공항에서 첫차가 움직일때까지 노숙을 했다. 철이 철이니만큼 공항 내부는 온통 가짜 벚꽃이었다. 그 아래서 자고 일어나 우에노 공원으로 향했지만 피어나는 벚꽃의 시간을 바다 건너 나라의 사람이 딱 맞추기는 어려운 법. ‘하늘이 보이지 않았었다’며 늘 젊은 시절에 봤던 우에노의 벚꽃을 그리워하던 남편의 기대와 달리 공원의 벚꽃은 하나도 피지 않았다. 결국 그 해 봄 우리가 도쿄에서 본 벚꽃은 하네다공항에 만발한 가짜 벚꽃뿐이었다.


이제 밤도깨비 여행 상품은 거의 없다. 대신 전보다 훨씬 많아진 저비용항공사들이 다양한 시간대의 비행기를 띄운다. 여전히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우리는 그리움을 다소 섞어 가끔 그 시절의 밤도깨비 여행을 그리워하기도한다. 자정 무렵 인천 공항 위로 날아오르던 그 비행기안의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졸립고,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두근두근 흥분되던 그 느낌도 생생하다.


시즈오카로 떠나는 비행기는 오전 6시 50분 출발이었다. 일찍 자고 일어나 새벽 3시쯤 출발해도 넉넉할 거라는 내 계획이 달라진 건 남편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우리 전날 밤에 공항에 가서 잘래? 예전 생각하면서.”

결국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공항노숙이라는 것을 하기로 했다.


밤 열한 시가 채 되지 않아 도착한 평일의 공항은 한가했다. 인천 공항에선 라운지 이용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넵존을 먼저 찾는다. 하지만 늘 치열한 자리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니 역시 예상대로 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8번 게이트 쪽의 조용한 소파 구역으로 가야한다. 그곳의 2인용 소파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거의 칸막이 수준으로 높은 데다 활주로를 향하고 있어 방만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에 노숙하기엔 최적이다.


나만의 아지트같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밤새 졸다 깨다 했다. 자정이 넘어가고, 사람들의 발소리도 거의 사라진 깊은 밤을 지나는 동안 여러 번 깨어 뒤척거렸다. 예전엔 주변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도 잘만 잤는데 이제 깊은 잠은커녕 수시로 깨어 좀비 상태로 서성거렸다. 결국 긴 듯 짧고, 짧은 듯 길었던 그 밤이 지나고 조금씩 공항이 소란스러워지는 이른 새벽엔 더 이상 잠들기를 포기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커피를 마시고도 다소 멍한 상태로 비행기를 탔고, 잠깐 졸다 깨었을 땐 창밖으로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즈오카에 내린 건 오전 9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호텔에 캐리어를 맡기고 기차를 타고 근교 시미즈항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꾸벅꾸벅 줄었다. 참치와 벚꽃 새우를 먹겠다며 찾아간 시미즈 어시장에서 그것들을 맛있게 먹고 나선 다시 식곤증으로 눕고 싶어졌다. 시즈오카 시내로 돌아와서 오후 내내 돌아다니다 결국 우리는 오후 4시쯤 호텔로 돌아와 둘 다 낮잠에 빠져들었다. 여행지에서 낮잠이라니. 예전의 우리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제야 더 이상 공항 노숙을 버텨내지 못하는 우리의 나이와 체력을 실감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어둠이 내린 시즈오카 거리를 걸었다. 밤거리엔 더운 공기가 가라앉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다음날 아주 일찍 호텔을 나설 생각이었다. 후지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후지산 세계 문화유산센터까지 가려면 한 시간 반쯤 열차를 타야했고, 후지산 정상은 이른 아침이 아니면 금세 구름에 덮여버린다고 해서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항 노숙으로 여전히 남은 피곤과 묵직한 어깨로 일찍 나설 생각을 하니 꾀가 났다. 슬쩍 떠보니 남편도 같은 눈치였다.

결국 우리는 다음날 예정보다 더 늦게 후지산 세계 문화유산센터로 향했다. 예상대로 정상 부근은 구름이 왔다갔다 했다. 살짝 아쉽긴 했지만 정수리에 휜 구름을 두른 후지산을 한참 바라보다 돌아서며 우리는 말했다.

“후지산은 후지산이야. 봤으면 됐지, 뭐. ”


4박 5일의 일정은 새벽 비행기로 시작해서 늦은 밤 비행기로 끝났다. 묵직한 어둠과 적당한 선선함이 함께 어우러진 깊은 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오는 내내 남편과 나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추억이 되어버린 그곳의 후지산과 검은 오뎅, 그리고 시작부터 무리한 탓에 내내 피곤하다,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던 우리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즈음엔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부턴 절대 공항 노숙 같은 건 하지 말자. 우리 나이를 잠깐 잊었었네.”


하지만 살다보면 대부분의 교훈은 입맛에 맞게 기억하거나 혹은 잊기도 하는 법이다. 우리가 시즈오카에서 얻은 ‘이제 예전 체력이 아니다’라는 교훈역시 그렇다. 어느날 갑자기 오밤중에 출발하는 싼 항공권이 뜨고, 덩달아 일정이 맞는 하루가 온다면 아마도 우리는 망설임없이 밤의 공항 어딘가에서 쪼그리고 밤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 여행에 관해서라면, 교훈을 잊는것이야 말로 우리가 계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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