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스토리
나는 울고 있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무작정 울고 있었다. 나무대문을 붙잡고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고싶은데, 문이 열리지 않아서 미칠것 같았다. 누가 나를 가둬놓은것 같았다. 마당에는 세숫대야와 옆으로 누운 개 한마리가 있었다. 아무리 울어도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울었을까,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문을 내쪽에서 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로로 질러진 나무빗장의 나무대문이었다. 빗장을 왼쪽으로 밀어내고 안쪽으로 잡아당기니 문이 활짝 열렸다. 바깥에 있던 대낮의 하얀 빛이 내게 와락 쏟아져들어왔다.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이다. 엄마가 하는 가게로 걸어갔다. 장사를 하는 엄마는 내가 와도 본체만체 손님과 얘기하느라 바쁘다. 자다깨어 몰골이 어떤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집밖에 나왔다는 안도감에 엄마를 뒤로하고 아이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갔다. 시장안의 한 구석에는 창고처럼 비어있는 곳이 있었다. 각종 자재나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있다. 나도 어느새 그틈에 끼어 물건들 사이에 숨었다. 커다랗고 푹신한 덩어리들이다. 나일론 솜 덩어리들을 보따리처럼 묶어놓은 것인데 그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늑하고 따뜻하다. 아이들이 찾으러 다닌다. 아무도 못찾겠지, 하는 찰나 까까머리 철호가 나를 봤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못된 아이다. 괜한 심술로 아이들을 골탕먹이거나 괴롭히는 아이라 절대 친하고싶지 않은데, 그녀석이 나를 찾았다. 눈빛이 세다. 나를 보더니 큰 솜을 묶은 보따리로 더 누른다. 숨이 막힐것 같이 답답하다. 이새끼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쉽게 움직이기 어렵다. 하지만 솜보따리는 생각보다 힘이 없어서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가니 옆 보따리 사이에 길이 있다. 위에서 누르는 철호를 보며 옆으로 기어나와 버렸다. 아직도 철호는 있는 힘을 다해 누르고있다. "야, 너 뭐해?" 소리질렀다. 돌아보는 철호는 약이 올랐다. 흥, 하고 뛰기 시작했다. 니들하고 숨바꼭질 안한다. 달려나가니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쪽이 있다. 어느 구석엔가 예쁜 돌들이 있다고 했다.
돌이 아니라 유리같은 작은 보석들이었다.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또 몇가지 색이 섞여있는 오묘한 색들의 자갈같은 돌들이다. 이게 뭐지 하면서 마구 쓸어담았다. 주머니에 넣고, 또 넣고, 주먹가득 쥐고있을때 '야 누가 온다'하는 소리에 뛰어나갔다. 빈 가게들이 드믄드믄 있어 낮에도 어두컴컴한 시장골목을 달리다가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다. 주먹안에 쥐고있던 보석들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철호다. 나를 쫒아오다 뛰어나오는 나와 부딪혔는데, 그 단단한 머리는 멀쩡하고 내 입술은 터져 피가 흘렀다. 철호는 놀라 뒷걸음질 하면서도 고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난 주먹을 편채로 먼지와 쓰레기가 뒹구는 바닥에 쏟아진 보석을 본다. 입에서 터진 피가 보석위에 뚝뚝 떨어진다. 어 내 보석...하지만 아파 죽을것 같아 운다. 피를 흘리며 엉엉 크게 소리를 내며 엄마가게로 걸어갔다. 손님 없이 혼자 있던 엄마는 나를 보고 욕을 한다 "저 미친년이 어디서 저러고 다닌대! 빨리 집에 가!"
터벅터벅 집으로 간다. 입에서 나오는 피가 조금씩 줄어든다. 입술이 엄청 아프다. 아직 언니는 학교에서 오지 않았다. 아까 열었던 나무대문을 지나, 아랫방의 창호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깔린 이불위에 누웠다.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파란색 아몬드 모양에 빨간색 노란색 흰색 주황색 점들이 콕콕 박혀있는 거다. 이리저리 돌려본다. 다른 보석들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본다. 오후 햇빛이 손바닥에 살짝 내려앉는다. 보석에 반사된 빛이 방안에 영롱하게 빛난다. 널려있는 옷가지와 이불, 밥통위로 무지개 빛이 비춘다. 엄마는 바쁘지... 일하느라 나를 돌볼 시간도 힘도 없지... 언니는 학교갔지... 나는 이 보석만 있으면 되. 조금만 기다리면 언니가 올거야... 생각하는 사이 또 낮잠이 들었다.
언니가 흔들어 깨운다."너 입술 왜이래? 어디서 그랬어?" 짜증이 난 목소리지만 눈은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본다. 아까는 몰랐는데 아랫 입술이 부풀어 눈을 내리깔면 코보다 더 먼저 보인다. 퉁퉁 부어서 아프다.
"시장에서 달리다가 철호랑 부딪혔어. " "아휴, 이게 뭐야. " 언니가 내 입술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리곤 부엌으로 밥을 하러 간다. 아, 이제 언니가 왔으니 나는 안심이다.
언니는 4학년이다. 엄마가 늘 가게에 있으니 언니가 저녁밥을 했다. 집안 어디엔가 나 말고 다른 식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썩이지 않고 차분해진다. 골목에도 나가고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방안에 있는게 더 좋다. 엄마는 가게에 있다. 언니는 여기에 있다. 나는 언니랑 같이 있다. "야 밥먹어", 언니가 상을 들고 들어온다. 밥과 콩나물국, 김치 뿐이다. 입을 벌려 가까스로 밥을 집어 넣는다. 국물이 입술에 닿을때 찢어지게 아프다."어휴 저거 어떡해..." 화가 났지만 언니는 걱정이다. 겨우 4학년인데 동생을 챙기는게 얼마나 귀찮을까. 맨날 껌딱지처럼 붙어있으려고 하고, 가는 곳마다 쫒아다니는 동생. 나는 생각한다. 낮잠을 자고나서 울지 않을 수 있는건, 언니가 있을때 라고. 내일부터는 언니가 학교갔다 올때쯤 자야겠다고. 그러면 울지도 않아도 되고, 골목에 나가고싶지도 않을거라고. 엄마는 바쁘니까. 엄마는 일하느라 힘드니까. 언니가 데워온 콩나물국은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서 입술이 쓰라린다. 하지만 웃는다. 언니가 있는게 좋다. 하나도 무섭지 않고 가슴속에 넘실대던 파도가 잠든듯 고요하다.
언니한테 보석을 보여준다.
"이거봐. 예쁘지?" " 어디서 났어?"
"시장안에. 언니 이거 주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석 그 다음으로 예쁜걸 내민다. 언니가 손을 편다. 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저녁이 오고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