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행복훈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티 Jul 26. 2021

폐암4기 친구와 소주 한 잔

유쾌한 암환자에겐 미래가 보인다

달라진 건 술잔의 숫자뿐이었다


예전 같으면 2차는 무조건 맥주집이었을 텐데 그들은 베이커리에서 2차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전히 오고 가는 말은 모두 농담뿐이었다. 진지하게 서로에 관심을 보이고 걱정하거나 축하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서로 적당히 면박을 주고 누가 한마디 하면 어떻게 솔직 발랄한 유머로 맞받아칠지만 골몰하는 말들의 잔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행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삼계탕을 먹으며 소주를 딱 한잔만 했다고 한다. 딱 한잔은 괜찮다고 했다. 의사도 담배는 무조건 끊으라고 했는데 술은 굳이 마시지 말라는 말을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 만나서 소주 한 잔 하고, 2차로 차 한잔 마시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기 말 많이 하고 싶은 라떼로서, 주인공은 자꾸 아들 자랑을 한다. ROTC 하고 어디에 취직을 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다. 주제가 이리저리로 맥락 없이 오가며 이야기가 자꾸 끊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아들 얘기를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한마디 한다.


"야, 너 은근히 자식 자랑 많이 하네."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하는 댓구가 그렇다.

오늘의 주인공은 히죽 한번 웃고 만다.

다른 이들에게 전달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모르겠는 분위기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는 표정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요즘 같은 취업난 세상에 ROTC 출신 장교로 복무했던 둘째 아들이 어딘가(어딘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에 취업을 잘해서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병문안 한다면서 같이 놀고 있는 그들


"이번 토요일에 별일 없지?"


남편은 이렇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묻자, Y를 만나러 가봐야겠다고 한다.

암 말기라는 말도 무서운데 온몸에 암이 퍼져 있다고 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그 친구를 다른 친구와 같이 보러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친정에 들르기로 하고, 남편은 친구와 만나서 말기암 환자 친구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암이 온몸에 퍼진 말기암 환자라면 항암치료받으며 병원에 입원해있거나, 호스피스 병동에 있거나, 이도 저도 안되면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있거나, 셋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 집에 병문안 가기로 했는데, 약속시간 한 시간쯤 남기고 이동 중에 Y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희들이 편한 데로 내가 갈게. 나만 움직이면 되니까."


남편은 그러자고 했다. 나는 "무슨 소리야. 우리가 너 있는 데로 가야지"하고 말할 줄 알았는데 선뜻 "그럴래?" 하고 받아들였다. 이 친구가 이럴 줄 알았단다.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는 처지에, 이것저것 사업을 해왔지만 현재 무엇을 하는지 명확하게 모르는 그 친구가 살림살이를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먹는 건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 거야?"


일단 만나서 물어보고 메뉴를 정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친정 근처 상가 밀집구역 주차장으로 남편은 나갔고, 나는 친정엄마, 언니를 만났다. 세 모녀는 나무 아래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다 해가 뉘엿해지자 몇 주 전에 가본 한정식집에 불고기 정식을 먹으러 갔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마음까지 시원하다.


남편이 친구를 만난 지 네 시간 가까이 돼서 전화를 했다. 30분 후에 찻집으로 데리러 오라고 한다. 그러면 남편이 시간 맞춰 주차장으로 나오겠단다. 가보니 남편이 나와 있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보니, 베이커리 출입문 쪽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출입문 쪽으로 한발 다가서니 남편이 손을 흔든다.


'그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얼굴 한 번은 봐야겠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넷이서 나를 본다. 나는 입구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린다. 선배님들한테.




말기암 환자의 안색과 표정이....


주먹 악수를 나누었다. 같은 과 3년 선배인 남편의 동기들을 보는 건 족히 25년은 넘은 것 같다. 소식은 듣고 있지만 굳이 만나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만나면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나는 크게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만남은 인정하되 결혼 이후 동참하지는 않았다.


사실 부담스러웠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말기암 대학 선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실없는 농담이 여전했기 때문에 테이블을 감싼 분위기는 실없는 웃음으로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아픈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냥 여전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웠던 그들의 대화가 이제야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선배님, 몸이 많이 안 좋다면서요. 어떻게 하고 계세요?"

하며 나는 오늘의 주인공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말기암이라는 그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모든 얼굴 중 가장 좋은 얼굴빛을 하고 있다. 하얗고 깨끗하다. 몸집도 적당하다. 표정도 밝기만 하다.


20대였을 그는 대학시절부터 낯빛이 좋지 않았다. 피부는 울퉁불퉁했고, 무엇보다 피부가 속에서부터 어두웠다. 그게 햇빛에 그을리거나 한 게 아니라 진피가 먹을 살짝 머금은 듯했다. 그래서 암 발병 얘기를 들었을 때 오래전부터 뭔가 안 좋았던 게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말기암 환자가 되었으니 형편없는 안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더 좋아져서 나타났다.


오늘의 주인공은 장난기와 잘난 체가 여전한 표정으로 아프다고 배려 한 조각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 생기가 충천이다. 이미 대화 주도권을 뺏긴 듯했지만, 희희낙락 중에 끼어들기 기회를 엿보며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했다. 뭐라도 자랑질은 희화화하는 친구들의 농담 사이, 대학시절 영어공부 얘기가 Vocabulary 22000이냐, 33000이냐, 55000이냐를 두고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요즘 아프느라 일을 쉬고 있어 몸이 편하고 마음도 편하고, 담배 등 안 좋은 거 안 하니 '좋다'고 했다.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아 정말 어떻게 이렇게 좋아 보이냐고 다시 한번 감탄을 했다. 그들은 정말 그날 딱 한번 진지한 말을 했다.




희망은 항상 움튼다


올초 설 명절에 그는 실신을 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검사를 해보니 뇌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건 전이된 것이었다. 다시 검사를 해보니 폐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4기 진단을 받았다. 말기란다. 하지만 그것조차 전이된 것이었다. 암이 시작된 곳을 찾아보니 신장이 문제였다. 신장 하나가 암세포로 거의 못쓸 지경이 되었고 골반 등 뼈로도 전이가 되었단다.


암 얘기를 여기저기에서 들었지만 최악의 수준이었다. 수술이 어려운 수준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도입한 최신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현재 그에게는 통증이 없고, 식욕은 여전하며, 기력도 좋다고 한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닌데 후배 때문에 지난해 실비보험을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료비 부담이 많이 줄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1회에 8백만 원 한다는 항암치료에 그는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돌싱인 그는 예순 즈음으로 30대 초반의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솔로 남성 셋이서 사는 것이다. 그는 아들들에게 가장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집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아들들이 "아빠가 제일 빨리 할 것 같다. 그러니 그냥 아빠가 아빠 집을 가지시라"고 입을 모았다.


그 말을 하며 그는 나이가 들수록 재혼에서 노골적으로 경제적 조건을 따지는 세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비판에는 재혼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는 미래에 매우 긍정적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최악일 수도 있는 일을 덤덤히 겪어내고 있는 그에게 미래가 엿보인다. 희망을 놓지 않는 이상 절망은 자리하기 어렵다. 상황이 더 나빠지더라도 거기에 알맞은 새로운 희망이 다시 자리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얼마를 더 생존할지 알 수 없다. 100세까지는 충분히 살 수도 있을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내일 또는 다음 달, 내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반대로 말기암쯤은 이겨내고도 남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의 의욕과 희망과 긍정과 유머에 박수를 보낸다.

모든 게 변한다.

그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 앞 이미지 : Pixabay에서 받은 jplenio님 이미지

       

매거진의 이전글 시험에 떨어졌을 때 부모의 말 "정말 잘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