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만남
4.
여기까지 읽자마자 혁은 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일 보낸 시각을 보니 밤을 새서 마무리 하고 쓰러져 자고 있을게 분명했지만 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 번 협의 이후 수정 상황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진과 함께 작업하면서 이렇게 독단적으로 무진 혼자 진행한 적은 없었다, 이건 뭔가 무진 답지 않았다. 캐릭터 설정과 두 인물의 관계가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문장도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성급하다 할까 거칠다 할까, 평소 무진의 글에서 느껴지는 조심스러움이 대신 다른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꼭 쫓기는 느낌이었다. 완성속도도 평소 진의 집필속도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빨랐다. 혁은 무엇보다 이 점이 껄끄러웠다. 무진은 결코 서두르는 타입이 아니다. 단 번에 써내려가기보다 하나씩 되짚으며 나가는 편이다. 연속 세 번째 메시지를 남기라는 음성 안내를 들었지만 혁은 다시 한 번 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무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집으로 찾아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무진은 절대로 혁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주지 않았다. 3년 전 처음 만난 날 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에 가보고 싶어 별별 핑계도 만들어 보고 은근 꾀를 내어 보기도 했지만 무진이 넘어간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남자가 남자 집에 가보고 싶다고 계속 조르는 것도 어딘가 모양새가 이상한 것 같아 나중에는 체념해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연락이 안 되자 최소한 어느 지역에 사는 지만이라도 알아뒀어야 한다고 혁은 조금 후회했다.
***
3년 전, 혁과 무진은 송내역 근처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열리는 북토크에 참여했었다. 당시 막 뜨기 시작한 신진 추리소설가가 세 번째 장편을 내고 작은 동네책방에서 여는 북토크였다. 아직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끄는 작가는 아니지만, 역사적 픽션, 가벼운 판타지, 살짝 가미되는 브로맨스 등으로 탄탄히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였다. 혁은 작가의 첫 단편부터 매료되어 빅 팬을 자처하고 있는 상태라 북토크 공지를 보자마자 신청을 했고, 그 날도 제일 먼저 책방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유명세가 붙은 작가가 아닌데다 하필 비도 오는 가을날이어서 책방 안에는 책방 주인, 작가, 혁을 포함한 대여섯 명이 전부였다.
책방주인이 긴장한 목소리로 작가에 대한 소개를 끝내고 작가에게 마이크를 넘기려는 순간, 책방 문이 열리고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 들어왔다. 작은 공간 안에 있던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명백한 습기였다. 그때 들어온 사람이 무진이었다. 예기와 습기, 그 날의 무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이 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우산 대신 검은 후드티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물을 뚝뚝 흘리며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무진은 열 몇 개의 눈동자들 중에서 정확히 혁의 눈동자를 골라 뚫어지게 마주보았다. 지금도 혁이 그 날을 생각하면 무진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먼저 떠올랐다. 작가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자 가볍게 목례한 무진은 혁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작가의 창작 과정과 소설 속 이야기로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그간 추리소설 작가지망생으로 여러 가지 습작을 써보던 혁은 들뜬 마음으로 서너 가지 질문을 준비해갔었다. 손을 들고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려는 찰나, 뒤쪽에서 낮고 서늘한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잊혀 지지 않는 음색이었다.
“작가님은 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작품 속에서 제일 먼저 만드는 게 살인입니다. 살인을 먼저 계획하고 나서 캐릭터나 사건도 만들죠. 항상 살인이 먼저입니다.”
“살인이 그 자체로 살인의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대부분은 돈이나 치정, 원한 등의 목적이 분명한 경우, 동기가 분명한 경우를 독자들은 더 선호합니다. 그래야 권선징악적인 카타르시스가 생기거든요. 헌데, 요즘에는 소시오패스라거나 사이코패스처럼 살인 그 자체가 목적인 범죄를 다루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써보고 싶기도 하고요.”
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질문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답변하는 작가가 아니라 답변을 듣는 무진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쌀쌀함이 발목에서부터 올라왔다. 그 덕에 혁은 정성스레 준비해간 질문지의 질문을 하지 못하고 책방 주인의 의례적인 질문과 더 의례적인 작가의 답변만 듣고 끝내야했다.
작가의 신간에 사인을 받고자 앞으로 나가려는데, 검은 후드 티를 입은 아까 그 남자, 무진이 혁 앞으로 먼저 나가서 작가의 책 세 권을 내밀었다. 표지가 상당히 낡은 것으로 보아 아주 여러 번 읽은 듯 했다. 사인을 받고 무진은 조용히 서점을 나갔다. 눈으로 무진의 뒤를 쫓던 혁은 자신을 부르는 작가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네, 아 작가님, 저 진짜 팬입니다. 성 혁입니다. 성 혁.”
자신도 모르게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두 글자 이름을 말하고 책에 사인을 받았다. 혁은 조금 들뜬 마음으로 책방을 나와 전철역을 향해 걸었다. 비가 조금씩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이 들려왔다.
“정명석 작가 팬이에요?”
얕은 소름이 손끝까지 피어올랐다.
“저요?”
당황한 혁이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자 어두운 골목에서 무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진이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앞에 역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커피가 맛있는 곳이 있어요. 제가 살게요. 가요.”
이름도 묻지 않았고, 이후 일정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혁은 무진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날 혁은 카페 영업이 종료되어 근처 치킨 집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치킨 한 마리와 생맥주 500CC를 마시다 전철 운행이 종료될 때까지, 다음 날 처음 보는 곳에서 눈을 뜨기 전 까지, 무진과 온갖 얘기들을 나눴다. 판타지와 탐정, 사랑과 애욕, 치정과 살인, 충동과 광기를 넘어서 자신의 찌질한 연애와 가족사까지도 다 꺼냈다. 그리고 눈을 뜬 곳은 요상한 장식이 달린 큰 사이즈 여성복이 가득한 옷가게 안쪽의 탈의실 바닥이었다. 숙취에 찌든 눈으로 커튼을 젖히고 나오자 무진은 탈의실 바로 바깥의 작은 카우치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덕분에 혁은 혼자서 김선자 여사님께 잔소리를 잔뜩 들어야했다. 아직도 김여사는 혁과 마주칠 때마다 그 날 일을 집어내며 놀려댄다. 덕분에 혁은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가게 안에 김 여사가 안 계신지 확인해보는 일이 버릇이 되어버렸을 정도다. 사실 혁은 그때 무슨 말들을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김 여사네 가게에서 잠이 들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무진에게 물어봐도 자신도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는 답변만 들었다.
어찌되었든 그 이후로 둘은 지금까지 함께 창작 작업을 하고 있다. 공모전 마다 다 탈락하고 온라인 플랫폼 연재 중인 소설의 조회 수도 얼마 안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진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안 느껴질 때도 많았다. 첫 만남 때 보였던 적극적인 모습과 묘하게 차가운 기운 역시 그 이후로는 착각인가 싶을 만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강아지 같은 느낌으로 혁을 대했다. 도대체 내게 왜 이렇게 잘 해주나 싶을 만큼 모든 걸 내게 맞춰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의아할 정도였다.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로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주냐?’고 물었더니, ‘이런 게 잘 해주는 건가?’하고 되물었다. 혁도 무진과 함께 있으면 편하고 걱정할 일이 없으니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어느덧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미운정이 들새도 없이 고운 정만 들은 사이 같았다.
‘지금 쓸데없이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 자식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갑작스럽게 무진과 만난 첫 날을 생각하다가 다시 소설의 위화감이 떠오르자 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근처 상가 매장들은 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고, 식당들도 이른 점심 손님을 받느라 분주했다. 혁은 다시 단축번호 1번을 눌러 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뚜르르르,.. 신호가 두 번 울리고 바로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혁.
-야, 뭔 잠을 이렇게 자. 새벽에 잠들었어도 보통 이 시간이면 일어나야 되는 거 아냐?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이런, 화내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 아,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실래?
-뭐? 지금 커피 얘기를 왜 꺼내.
-나 지금 밑이야. 잠깐만, 사장님. 에스프레소 한 잔하고 자몽에이드 한 잔이요. 전 누님이 만든 수제 자몽청이 에너지 회복에 최고로 좋더라고요.
-야, 너 지금!
-어 끊어봐. 들고 올라갈게.
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실 문을 열고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 <작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운터에 기대서 사장님과 대화하는 무진이 보였다.
“야, 너 내 전화는 그렇게 안 받더니 여기서 지금 뭐하는......”
“어머, 작가님도 내려오셨네. 그냥 여기서 드시겠어요? 제가 치즈케이크 대접할게요.”
“아니에요. 우리 누님께 폐를 끼칠 순 없죠. 작품 미팅 때문에 온 거라, 올라가봐야 돼요. 주세요. 마시고 가는 길에 컵만 갖다 드릴게요.”
무진이 어느 새 쟁반을 받아들고 혁 앞에 서 있었다.
“뭐 해? 문 안 열고?”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긴 혁이 문을 열고 조용히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무진이 사장누님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소리와 특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혁은 사무실 문을 열고 무진이 들어갈 때 까지 기다린 후 아래층까지 들릴 정도로 거칠게 문을 닫았다.
“삐졌어? 왜 이렇게 요란해?”
“소설 읽었어. 뭐야 이거?”
혁은 여전히 커서가 반짝이고 있는 노트북을 무진을 향해 돌려놓았다. 흘끗 모니터를 들여다 본 무진은 아무 말 없이 혁 앞에 작고 귀여운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았다. 자몽청이 몽글몽글 얼음사이로 떠다니는 길고 투명한 유리컵을 손에 쥐고 무진은 창가로 다가갔다. 혁은 그런 무진에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무언가가 찜찜한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포식자가 다가오는 것 같은 불안, 분명히 존재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불안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은 곧 짜증이 됐고, 혁은 그 짜증을 지금 무진에게 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