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설의 결말
작은 컵 속의 에스프레소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얼음이 녹는 것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자신의 음료를 마시던 무진이 드디어 혁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를 돌려 등받이에 팔을 괴고 혁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는 순한 강아지 같았다. 입술 끝도 살짝 올라가 미세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봐. 소설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몰라, 실은 어제 잘 안 써져서 술을 한 잔 마셨거든. 그랬더니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머리도 아프고 잠도 안 오고, 그 상태로 그냥 미친 듯이 써내려 간 거야. 결말을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도 잘 안 떠오르더라고.”
말이 안 된다고 쏘아붙이려던 혁은 무진이 이어서 이야기하려는 것을 눈치 채고 식은 에스프레소를 넘기며 계속 듣기로 했다.
“쓰는데 자꾸 J가 나처럼 느껴지는 거야. 경험도 없으면서 범죄와 살인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게 좀 우습기도 하고. 그 순간에 J가 소설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지금까지 글 쓰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어.”
“그래서, 진짜로 범죄를 저질러 보게? 사무실에 칼이 없는 게 다행이었네?”
“무슨 말이 그래. 설마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무진이 빙그레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런 무진에게 혁은 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J의 집필 과정에 K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J를 비웃으면서 둘의 갈등이 고조되고 K를 향한 불만이 커지면서 폭발하듯 사건이 벌어진다. 이게 진행 방향이었잖아. 그런데 이건 너무 엇나갔고, J랑 K 대화나 관계가 마치......”
‘마치, 너하고 나처럼 느껴져.’ 차마 혁은 이 말을 꺼내놓지 못하고 안으로 삼켰다. 말로 인정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진은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여전히 빙글거리는 눈웃음을 하고 혁을 바라보았다.
“왜 우리 둘 하고 닮은 거 같아?”
“야!”
순간 혁이 느낀 감정은 뜻밖에도 부끄러움이었다. 상대의 속단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속마음을 들켰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
“그런 게 아니라, 글과 너 자신이 제대로 분리가 되지 않으면 소설이 진행되지 않잖아. 너무 투영하지 말고 객관적인 모습에서 글을 쓰자고. 물론 작가의 모습이 소설 속 인물에 드러나는 건 자연스럽지만...”
혁의 말을 듣고 있던 무진이 노트북을 다시 혁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일단 끝까지 읽어봐. 다 읽지도 않고 전화부터 한 거야?”
무진은 혁이 남긴 에스프레소 잔과 자신의 유리컵을 들고 왔던 쟁반 위에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 여유 넘치며 빙글거리던 웃음이 사라지고 조금 조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읽고 있어, 카페에 컵 가져다 드리고 올께.”
무진이 사무실을 나간 후 혁은 정오의 햇살이 울렁이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 다시 화면 속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5.
정신을 차렸을 때 K는 한밤중인가 생각했다. 캄캄했지만 어딘가 환하다는 것을 인지했고 곧 눈에 무언가가 씌워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고 손과 발을 까딱여보았다.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가 밀려왔다. 어딘가 잘못되거나 크게 다치진 않았다는 것을 알자 몸을 일으키고 싶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를 들어 올릴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움직여 봤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절망만 커질 뿐이었다. 입에는 재갈 종류가 물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으으으으’하는 신음만 귀에 들려올 뿐, 단어가 되지 못한 음성만이 공간에 가득했다. 몸이 묶여있거나 고정되어 있다, 이 인식만으로도 K는 미칠 것 같았다. 공황발작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생각했을 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안 돼 J, 그렇게 마구 움직이면 손목이랑 발목이 상해. 목도 아플 거 라고.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K는 크게 울부짖고 싶었다.
-J, J, 알아,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지? 네 마음을 왜 모르겠어. 다 알지. 설명해줄게. 우선 너는 내 방안에 묶여있어. 잘 고정되어 있고, 진정제를 맞았어. 기억나? 주사바늘로 살인하는 얘기 했을 때 너 비웃었잖아. 제약회사에서 소송도 들어온다고. 그래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회사 제품을 다 사 모았어. 그러니까 네 몸 속에 다 집어넣을 거야. 공평하게. 어느 회사 제품이 가장 성능이 좋은 지 비교는 못해서 아쉽지만.
얇은 무언가가 스치듯 바스락 거리며 봉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J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어 K는 더욱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어째서 J가 자신을 J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J가 자신을 J라고 부를 때마다 미칠 것처럼 불안해졌다.
-네가 정신을 차릴 때마다 이렇게 진정제를 놓아야 하니까 웬만하면 그냥 계속 자면 좋겠는데. 하도 몸부림쳐서 주사 놓기 힘들단 말이야. 화장실은 신경 쓰지 마, 그냥 싸버려. 너는 몰랐겠지만 기저귀 채워져 있어. 내가 계속 갈아입혀주고 있다고. 응? 고맙다고? 우리 사이에 무슨. 괜찮아.
낮게 키득거리며 J가 웃었다. 어딘가 멍한 웃음소리와 달리 손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주사바늘과 약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 너 칼에 찔렸던 거는 생각나? 그대로 기절했었잖아. 생각보다 소심한가봐, 겨우 그 정도에 정신을 잃을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덕분에 내가 응급처치 하느라 힘들었어. 그런데 왜 가만있는 거야?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라는 걸 알고 놀랐어?
K가 넘쳐나는 정보를 짜 맞추느라 뒤척임을 멈춘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J는 K의 팔뚝에 주사 바늘을 능숙하게 찔러 넣었다.
***
-응, 잠들었어. 진짜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자기가 얼마나 엉망진창인 글을 쓰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아채지 못한다니까. 내가 J를 그냥 뒀어봐. 그랬으면 J는 저 형편없는 소설을 세상에 내 놓았을 거잖아? 그래놓고 자기가 작가랍시고 얼마나 거만하게 굴지, 안 봐도 뻔하다고. 이미 충분히 교만한 허영덩어리 주제에. 썩어빠진 문장 따위를 가지고 어디 소설이라고 잘난 척 하려고! 손가락 하나하나 마디마다 다 찢어서 변기 속에 집어넣어도 속이 안 풀려.
-괜찮아, 우선 내가 자기를 구해줬다는 인식만 분명히 하면 돼. 그럼, 그럼. 여리고 연약한 J가 세상 사람들한테 비웃음 당하는 걸 내가 어떻게 보겠어. 그 전에 내가 막은 거야. 그러니 내가 생명의 은인이자 영혼의 구원자인거라고. J는 내게 무릎 꿇고 감사하다고 눈물로 인사해도 부족하지. 그럼. 그러니까 이제 K, 소설은 내가 쓰는 수밖에 없겠지? 내가 직접, 멋지고 환상적이면서 매혹적인 문장으로 말이야.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역작을 쓸 거야. 그렇지? 그럼, 나는 K니까. 당연히 할 수 있지.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 J의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곳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있을 뿐. 자신의 이름도, 자기 얼굴도 잃어버린 채, J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욕실 안을 울리는 J의 웃음소리는 결코 K에게 까지 닿지 않았다. 끝.
6.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은 혁이 고개를 들자 차가운 물을 한 컵 들고 무진이 곁에 서 있었다. 무진이 건넨 물 한 컵을 단숨에 다 비우고 나서 혁은 싱글거리는 무진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기분 나쁜지 알았어. 이거 우리 얘기야? 네 얘긴 거야? 아니면 나야? 너도 J처럼 나를 찌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늘여서 한 거야?”
“그럴 리가. 들어봐. 사실 나는 내가 소설을 완성 하지 못할까봐 겁에 질려있었어, 자신 없었고,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도 같아. 네가 있으니까 아닌 척 하고 숨기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런 내 약한 면을 깨닫고 나니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꼼짝 않고 앉아서 후반부를 써내려 간 거야. 일종의 폭주 비슷한 거?”
무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혁은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예전에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더라. 아마 둘만의 북토크 뒤풀이 이후 매일같이 만나 서너 시간 씩 소설을 써대던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무슨 얘기를 했었지? 소설에 대한 평을 기다리는 무진 앞에서 혁은 잠시 어느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