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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이 Sep 13. 2023

일에서 감정을 분리하니까 '답'이 보였다

그런데 늘 '감정을 배제'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몇 주 전, 한 거래처에서 종이견적을 받으며 다음 과정을 진행할 업체를 추천받았다. 자고로 견적은 두세 군데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라 배웠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려는 종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하는 또 다른 업체에 견적을 문의했다. 그런데, "준비하고 계신 사양과 원하시는 종이로는 작업이 어렵겠어요. 사무실에 내방하시면 잘 맞는 종이와 견적을 추천해드릴게요." 라고 하지 뭔가. 이상했다. 한 곳은 '다 해줄게!'라고 하는데 또 한 곳은 '다 안되는데?'라고 하다니.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약속을 잡고 방문하기로 했다. 업체와의 대면 상담은 내게 스트레스 요인이다. 거래처가 되면 서로 윈윈하는 관계여야 하는데 그전까지는 뭐랄까, 무의식적으로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 '남 좋은 일 해서는 안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게 되니까 긴장도가 매우 높다. 그 때의 나는 나답기보다 더 '똑똑하게' 대처하는 상황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대표님이 나의 이런 부분들을 잘 알고서 "이번엔 혼자서 잘 다녀와 봐. 에피소드로도 잘 남겨두고."라며 놀리듯 말씀하신다. 어휴, 주여. 사무실에 방문하기로 한 날은 하필 우산을 쓰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쓰지 않은 채 다니기도 애매한 만큼의 비가 내렸다. 무게가 퍽 나가는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들고 다니자니, 출발부터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평소 길을 잘 잃어버리다보니, 일부러 조금 일찍 나섰다. 그덕에 약속시간보다 10분 미리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모두 외출하고 없는 것마냥 실내가 어둑어둑했다. 아무도 없는 건가 싶어 문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몸을 반쯤 들이밀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한번 더 목소리를 높여 인사를 건넨 후에야 안쪽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분이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며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구석구석 둘러보며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릴 수 있는 만큼 휙휙 돌려가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책을 만드는 곳이라 그런지 책이 정말 많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지나고서, 늦어서 미안하다며 업체 대표님이 들어왔다. 그래 뭐, 바쁠 수 있으니까. 이런 건 일단 넘겨보기로 한다. 그로부터 수십 분을 더 이야기했다. 우리가 제안한 내용들이 안되는 이유를 엄청 자세하게 얘기해줬는데 진짜 우리가 불가능한 걸 해달라고 요구한 건지, 여기서 할 수 없으니 안된다고 하는 건지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웠다. 대안으로 제안해준 것들을 일단 기록해두었다. 이 모든 게 다 자료가 될 테니까. 


내가 빈정상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 책에 이것저것을 기록하고, 형광펜으로 칠도 하고, 접어서 표시도 하며 읽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본문에 쓰일 종이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중요하지만, 구매를 결정짓게하는 데 책 무게와 재질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팅을 하는 내내 거듭 '내지' 종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더랬다. 그런데 "그래봤자 펜으로 쓰는 거죠."라는 식의 반응은. 혹시 내가 너무 감성적인 걸까. 


물론 책을 좋아하고 아끼는 것과 별개로,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책이 상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뭐랄까. 이걸 어투의 문제라고 해야할지, 태도의 문제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현장에서 오래도록 일한 사람의 무뎌짐일까. 이래저래 마음에 안드는 양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 업체와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사실, 이 업체가 일을 못한다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눈탱이를 치려고 한 건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그저 가치관이 다른 것일 수 있다. 가치관이 다른 게 '그저'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집에 돌아와 아빠랑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같이 걸으며 고민되는 부분들을 나눴다. 내가 먼저 두 업체를 비교하고,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 정리되어야 대표님께도 미팅 건에 대한 보고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리가 됐다. 내가 느낀 감정은 배제하고. 

처음 소개 받은 A업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대신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 추가로 미팅을 다녀온 B업체는 제작비용을 줄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고급스러움'을 나타낼 방법을 제안했다. 비싸더라도 힘을 들여 '만들고 싶은' 책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비용을 낮추고 부분적으로 힘을 줘서 책을 만들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남았다.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답이 분명해졌다. '오랫동안' 좋은 내용의 책을 만들어서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게 내가 찾은 답이었다. 일반적으로 목표를 거대하게 잡고 나면 출발하기가 어려워해서 도전 가능한 정도의 수준으로 목표를 작게 쪼개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하면 해야 할 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져 출발하기도 쉽고, 꾸준하게 이어가기가 쉬워진다. 


책을 만들어서 파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첫 책'을 잘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을 여러 곳에서 듣고 보았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고,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꼭 비싼 재료로 만들어야만 '좋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느새 1쇄에서 택할 방법들과 2쇄를 찍게 됐을 때 어떻게 차별점을 두면 좋을지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후아. 


다른 업체들의 비교견적이 더 필요해졌다. 덕분에 또 긴장감 있는 대화들을 해야하겠지만, 덕분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지 알게 됐으니 개인적으로는 그 무엇보다 큰 수확을 얻은 경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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