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계약을 앞두고 대표님으로부터 연봉협상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벌써?라는 생각도 잠시, 덕분에 내가 이곳에서 그동안 무엇을 했고 개인적으로 이뤄낸 것과 회사에 유익이 되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보낸다. 아직 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머리가 아프다.
사실 연봉협상이 처음이다. 이전엔 계약직으로 근무했거나, 호봉제라서 알아서 올랐거나, 내가 대표라서 누가 나에게 연봉을 협상하자고 했던 적이 없었다. 그동안 했던 일은 정확하게 매출이 높아졌거나 재구매율이 높아지는 등 수치화하기 어렵지 않은 성과들을 냈다. 그런데 도통 지금 하는 일에선 나의 성과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잠시간의 시간으로 답을 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생각이 방향을 틀었다.
그간 읽어본 업계 선배들의 책을 읽어보고 정리해 본 핵심 역량은 사람들이 원하는 디자인(책)이 무엇인지 읽어내는 눈과 직관적 사고, 그리고 빠른 손(빠른 작업 속도)과 소통 능력이었다. 디자이너도 편집자도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드는' 것만 할 수는 없다. 만족할 만한 작품이면서도 팔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아직 유명하지 않은 작가를 발굴해 낼 수 있는 눈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지 않을까. 적다 보니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게 점점 많아진다.
이런 역량들을 타고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편집자)의 핵심 역량은 내게 아직 없거나, 미비한 수준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중에 다행인 걸까. 내가 가진 재능들이 타고나지 못해 아쉬운 것들을 보완하기에 너무 탁월한 거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관심 있어하는 것을 배워 알고자 하는 학구열이 있고 작고 사소한 것들조차 지속해서 이어 나가는 꾸준함이 있으며 작업물이나 나에 대한 피드백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얼마든지 수정하며 변화해 가려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깊이 파고드는 취미가 있으며 시간을 밀도 있게 활용하고 더 일을 잘하기 위해 내가 가진 에너지들을 잘 배분해서 일정과 컨디션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지금의 나보다 내일의 나를 더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음. 너무 어그로인가. 아, 일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번 주는 업무 외 시간에 자존감이 격하게 떨어진다.
아마도 패기를 넣은 게 아닐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겐 재능이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재능이었죠. (최인아,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143p)’. 최인아 대표는 카피라이터들에게 필수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기에게 없지만 자기는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카피라이터로서 좋은 결과물들을 충분히 만들어 낼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재능으로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결국 내가 발견한 나의 재능이 사람들도 인정할 만한 재능이 되게 하려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법뿐이 없겠다는 생각.
더불어 ‘이번 연봉협상은 어렵겠군' 싶지만 사실 그게 내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 낼 책들이 훨씬 더 많고, 내가 갖고 싶은 디자이너(편집자)들의 역량이 나의 재능이 되게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