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의 F라서 하는 고민들
요즘은 처음 만나면 “MBTI가 뭐에요?” 하고 묻는 게 퍽 자연스럽다. 심지어는 본인의 MBTI가 어떤 성향을 보이는지 알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것까지 알고 있어서 ‘아, 그런 스타일이구나' 하고 그 사람에 대해 대강의 프레임을 만든다. MBTI로 굳이 나를 정형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MBTI를 빌어 나를 설명하자면, 엣프피(ESFP)다.
이전의 나는 FFFF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요즘은 ‘어? 나 T인가?’ 싶을 만큼 분석적이고 냉정해진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좋았다. 그런 내 모습에 내심 뿌듯할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내 나름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쯤 전이었을 거다. FFFF이던 때였다. 일 때문에 동료와 카톡으로 연락을 하는데, 휴대폰 화면으로 보이는 텍스트만 보고는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고, 행동을 보면서 이해하는 게 아니니까 혼자 머릿 속으로 수많은 물음표를 만들며 추측하고 또 추측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나에게 불만이 있나?’ 단어 하나, 문장의 길이, 심지어는 줄임표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글자들에 담긴 의미를 상상하게 됐다. 심한 날은 불안에 휩싸여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기도 했다. 이는 곧 실수들을 낳았고, 크게 혼이 나지는 않았지만 대표님과 따로 만나서 주의를 들어야 하는 날이 늘어나게 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일을 잘한다는 건, 일과 감정을 분리할 줄 아는 것도 포함돼.
나의 감정이 나의 일상을 침범하기에 이르고, 스스로 망가져 가는 걸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감정이 날뛰지 않게 하려고 방법을 찾았다. 먼저는, 주고받는 텍스트는 그저 텍스트일 뿐 거기에 어떠한 의미도, 감정도 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럼에도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초조하게 만들면 차라리 직접 물어봤다. 내가 그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면 되는 건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게 정확한 건지 알려달라고. 한 번, 두 번.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더이상은 괜히 혼자 넘겨짚어 추측하고 시나리오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오히려 그러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도 신뢰가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디폴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다. 그래서 되도록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기 쉬운 콘텐츠는 눈길도 주지 않는 편이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일하지 않을 때도 크게 기쁘다거나 크게 슬퍼하는 등의 감정들을 느끼지 않게 된 것 같다는 거다. 일을 할 땐 기복이 없어서 좋은데, 누군가에게 충분히 고맙고 좋은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나누고 싶을 때조차 그게 잘 드러나지 않아서 간혹 미안한 마음마저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일할 때의 나와 쉴 때의 내가 스위치전환을 잘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더 능숙하게 일을 잘해내고 싶은데, 지금처럼 계속해도 괜찮을까.
다시 MBTI로 넘어와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나에게는 T성향이 1도 없다. 몇 달 전, 대표님이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크게 아프셨던 시기가 있었다. 입원해 있는 시간에도 일 생각을 하고, 일을 하실까봐 푹 쉬시라고 연락을 하면서도 ‘일정이 얼마나 딜레이 되는 거지?’ ‘지금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뭐더라?’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전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서운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정작 이런 생각을 했노라 얘기를 했을 때, 우리 대표님은 아무렇지 않아하셨다.) 그랬다. 가끔 보이는 ‘학습된 T같은 모습'은 나의 S에서 보이는 모습이라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차단하면서 현실중심적인 성향이 더 강해진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