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의 고민:조직 기대와 나의 가치 사이에서 길찾기

Phase 1: 마음 읽기 ②

by 황은희

회의실의 번역가, 그 고단한 뒷모습


오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 김 부장은 습관처럼 깊은 한숨을 내뱉곤 했다. 방금 전 회의실에서 자신이 수행한 역할은 '관리'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도의 통역'에 가까웠다. 임원의 투박하고 일방적인 지시를 후배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언어로 다듬어 전달하고, 거꾸로 후배들의 당돌하지만 날 선 요구들을 조직의 논리로 순화해 상사를 설득해내는 일.


커리어컨설팅을 하며 만난 수많은 40대 내담자들은 이 과정에서 겪는 정서적 소모를 가장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한 내담자는 이를 두고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고무줄 사이에 낀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소위 '중간관리자'라고 불리지만, 현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실체는 양쪽의 파고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방파제에 가까웠다.


내담자들이 말하는 ‘허리’의 비애


상담 현장에서 마주하는 40대들의 이야기는 꽤 닮아 있단 생각을 많이 한다. 그들은 대한민국 조직 문화의 대전환기를 몸소 겪어낸 세대다. 위 세대에게는 '헌신과 복종'을 배웠고, 아래 세대에게는 '수평적 소통과 공정'을 요구받는다. 나 역시 그렇기에 늘 그들의 이야기가 뼈저리게 공감이 된다.

내가 만난 한 대기업 팀장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상사의 모호한 지시를 구체적인 업무로 변환하는 데 진을 다 빼고 나면, 이제는 후배들의 '마음'까지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정작 내 성과를 낼 시간은 없는데, 돌아오는 보상은 예전만 못하니 내가 지금 무얼 위해 버티나 싶습니다."

이들이 호소하는 피로감은 결코 개인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라 생각한다. 조직의 시스템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나'를 보호할 안전장치는 갈수록 허술해지는 구조적 모순 때문이이란 생각이다. 40대는 조직 내에서 가장 비싼 인건비를 지불받는 집단이라는 시선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질 때마다 가장 먼저 효율의 잣대에 오르내리는 위태로운 지점에 서 있게 된다.


위태로운 ‘위험지대’를 단단한 ‘가교’로 바꾸는 법


하지만 나는 나를 찾는 이들에게 이 위기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하곤 한다. 우리가 처한 지점이 '위험지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직에서 가장 독보적인 '소프트 파워'를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대의 가치관을 조율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어내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현실적인 실행 계획으로 바꾸는 능력. 이것은 단순히 연차가 쌓인다고 생기는 기술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성공, 그리고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40대만의 고유한 콘텐츠다.

나는 상담현장에서 만나는 김 부장들에게 그들의 역할을 설명할 때 종종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이라는 단어를 빌려오곤 한다. 지휘자가 서로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아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듯, 40대는 조직 내의 불협화음을 성과라는 음악으로 바꾸는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는 이 '가교'의 역할은 AI나 자동화 시스템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고도의 숙련된 감각이다.


명함 뒤에 숨겨진 ‘이동 가능한 가치’를 발견하라


중요한 것은 이 능력을 '회사 안의 직급'으로만 제한하지 않는 태도다. 상담 중 "내일 당장 회사를 그만둔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부장'이나 '팀장'이라는 명함 속에 가두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사람을 관리하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발휘한 '기능(Function)'에 집중해야 한다. 갈등을 조정하는 퍼실리테이터인가, 복잡한 데이터를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전략가인가, 아니면 시장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기획자인가.

회사가 부여한 타이틀을 떼어내고도 남는 이 핵심 역량이 바로 우리가 야생에서도 살아남게 해줄 '이동 가능한 가치'다. 조직을 위해 방파제가 되고 다리가 되어주느라 고생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성실함을 나 자신을 지키는 '전략'으로 조금씩 옮겨올 시간이다.


당신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기 적힌 직급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그 직급을 감당하며 내가 쌓아온 '사람을 움직이고 성과를 만들어낸 안목'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오늘 하루도 조직의 허리로서, 세대의 가교로서 고군분투한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바람을 맞고 있는 중이라고. 지금까지의 성실함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김 부장님들 힘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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