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기업문화 이야기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겪게 되는 회사들은 흔히 직급 체계 안에서 돌아간다. 그리고 이런 체계가 전혀 놀랍지 않은 것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이런 문화는 굳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남자들은 군대에서 이미 한 차례 훈련을 받게 마련이고, 그것은 사회를 나오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사회 이곳저곳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초중고를 거치며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권력관계 정도는 누구나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에서 일이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로 "직급 체계"를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대학 재학 중 경험했던 2번의 인턴 경험(조직의 가장 최약자)과 졸업 후 첫 회사는 그러한 인식을 강화시키는 데에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인턴의 추억은, 나름 자율을 표방하는 국내에서 꽤 큰 IT기업이었지만 인턴 기간 내내 위에서 떨어지는 일거리와 과제를 받아 그것을 낸 출제자의 의도를 끊임없이 고려해가며 문제 풀이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에 어떻게든 머리를 싸매고 내놓은 결과물에 피드백이라는 이름의 가르침은 언제나 따갑고 매서웠던 것 같다. 이런 경험이 역량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라 믿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 필요한 수련의 과정임에는 동의한다.
인턴 혹은 신입이 어떠한 피드백도 없이 스스로 처음부터 업무를 해나갈 수 있을까? 인턴과 공채 출신 신입 문화가 익숙한 기업에서 이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으레 이러한 신입 나부랭이들에게는 사수가 있기 마련이고, "일을 배운다"는 개념으로 도제식으로 이것저것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천사 같은 사수를 만난다면 운이 좋은 편이지만, 보통의 가르침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회사란 곳이 여유를 허락하는 낭만적인 공간은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각자의 일이 있고 모두가 바쁘다. 그래서 신입에게 여유 있게 일을 A to Z로 차근차근 알려줄 수 있는 사수는 드물다. 그래서 보통 "깨지면서" 배워야 하고, 앞서 신입을 겪어냈던 사람들 역시 그랬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다고, 나 때도 그랬다며 오늘도 신입이 "깨지는 것"을 보며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통 신입은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견지되기보다는 가르침을 주어야 하고 깨워주어야 할 대상으로서 자율적인 대상이라기 보단 수동적인 계몽의 대상이다. 비단 신입뿐만은 아니다, 직급 체계에서 더 하위 직급에 속한 대상자는 대게 그런 대상으로 견지된다. 직급 없이 회사가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기에 앞서 신입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유이다. 이러한 직급 문화에 익숙해지면, 과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대상들이 가르침 없이 회사에서 스스로 일을 하고 회사가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된다. 직급이 없다면 극단적으로는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고 조직에 대한 통제력이 사라질까 두려움을 갖게 되기도 한다. 직급이 높은 누군가가 책임을 가지고 통솔을 하는 구조가 아닌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지금 재직 중인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기기 직전 회사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리를 옮긴 첫 한 달간은 이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직원수가 약 100명쯤 되는 지금 있는 스타트업에서는 직급 체계가 전혀 없다. 서로를 부를 때에는 각자가 입사하면서 정한 영어 이름을 부를 뿐이다.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과 같이 내 이름은 사라지고 직급만이 불리던 것과는 정 반대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오는 분위기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직급이 사라지고 이름이 불리는 문화에서는 개개인이 좀 더 자기 색깔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느낌이다.)
2달이 지나고 깨달은 것은, 회사가 돌아가는 데에는 직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높은 직급의 다른 의미는 더 많은 책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직급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뿐이지, 결국 개별 분야를 책임지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굳이 직급이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모든 회사에서 다 이런 문화가 워킹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IT 기업의 특성상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당위성이 있는데, 이런 전문성이 두드러지는 기업에서는 직급이 아니더라도 책임을 분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맡은 분야에 대해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개인의 전문성에 대한 평판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깎아 먹게 된다. 전문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납량특집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
이런 기업 문화를 세우게 되면, 관리 비용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짧은 기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며 관리라는 목적하에 채용되는 인력과 시스템에 소요되는 수많은 비용들을 봐왔다. 하지만, 팀원 개개인이 개별 분야에서 관리 시스템 없이 개인의 업무를 수행해 낼 수 있다면 이러한 비용은 매우 적다. (물론 지금 있는 곳에서도 이상적으로 워킹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관료제보다는 관리 비용이 정말 적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런 문화를 세우는 것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스스로 동기 부여하여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스크리닝하고 채용해내야 할뿐더러,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동기부여를 잃지 않도록 전사 차원에서 지속적인 조직문화 관리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타트업에서는 피플 컬처 팀이라던지 뭐 그런 이름으로 조직문화에 큰 관심을 쏟고 있는 편이다. (가장 크게 생산성을 드러냈던 조직 중 하나는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 구호기구였는데, 이들 조직의 공통점은 개별 구성원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의미를 모른 채로 일을 진행하는 조직의 경우 관리 비용이 클뿐더러 어느 정도 선 이상의 생산성을 내기는 어렵다고.)
그렇다고 직급 없는 기업 문화가 모든 조직에 워킹할 것이고 가장 수위의 문화이다!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해야 할 것이 명확하다던지, 창의성보다는 빠른 행동력이 더 중요한 군대나 생산시설의 경우에는 여전히 직급 문화는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백 년간 그 효과를 인정받아 전 세계에서 도입되어온 독일제 시스템) 하지만 굳이 직급 문화가 아니더라도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그것이 관리비용을 줄여주며 내부 구성원들이 직급아 아닌 자기의 이름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굳이 왜 스타트업에서 직급 문화를 전승해야 하나 싶다. 최소한, 직급 없이 조직은 워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작은 믿음 정도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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