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게 위로를 줬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 세르게이 라흐미니노프 / 출처: wikipedia >회사에서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거실에 널브러지곤 했다. 대부분 꽤나 늦은 밤이었다. 하루 종일 나를 감싸고 있던 신발과 자켓을 벗어던지면,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 꺼내 마실 기운도,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할 힘도 없는 듯 느껴졌다. 바닥에 펴 놓은 요가매트 위에 대자로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그나마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대체 이놈의 회사는 왜 이렇게 바쁘지?’
‘먹고 살기 정말 힘들구먼.’
‘매일매일 이렇게만 살아야 하나?’
몸은 그로기 상태지만, 머릿속은 잡념으로 활발했다. 하지만 대책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이 품고 있는 고민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태연하게 그날 할 일들을 하나 둘 곱씹으며 만원 버스에 몸을 실을 것이라는 것도. 그래서 그저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마음을 다독여주면 그만인 것이다.
여전히 누운 채 드보르작 교향곡 8번 3악장,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 혹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을 들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하나같이 포근해서, 생채기 난 마음을 어루만졌다. 상처는 서서히 아물었다. 어쩌면 그 고단했던 직장생활을 버틸 힘이 되어준 것은 몇 알의 영양제나 홍삼이 아니라, 찬 바닥에서 듣던 음악 한가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 곡 모두 자주 들었지만, 그 가운데 라흐마니노프에 조금 더 자주 손이 갔다. 어쩌면, 교향곡 1번의 처참한 실패 후 3년간 아무런 작품을 쓰지 못했던 작곡가의 고뇌와 좌절의 아픔이 묻어나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직장인의 옷을 잠시 벗은 지금도 그의 교향곡 2번의 서정적인 바이올린, 클라리넷, 오보에 선율 앞에서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는 느낌이다.
이번 2020 교향악축제에서 가장 기다린 곡도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었다. 늦깎이 학생이 신분으로 예전만큼 혹독한 일상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은 언제나 위로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던가. 잠깐의 정적 후 3악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나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