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칼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지난 27일 한 물류회사의 보안업체 직원이 물류회사 탕비실 냉장고에서 초코파이(450원) 한 개, 커스터드(600원) 한 개를 꺼내 먹었다가 절도죄로 기소되어, 무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판을 받은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사건이 있기 전에는 사무실에서 보안업체 직원들이 간식을 먹은 게 문제가 된 적이 없다"며 "이러한 사정 등에 비춰볼 때 당시 피고인에게 '절도의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벌금 5만원을 내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 무죄 판결이 나오기까지 피고인은 ‘초코파이 절도자’라는 민망한 죄명을 달고 고통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속 장발장을 떠올리게 한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의 비극은 19세기 프랑스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것 같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고작 1,050원어치 간식을 두고 검찰이 기소권을 발동해 2년씩이나 법적 다툼을 벌였다는 사실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검찰에 대한 여론의 비웃음을 사도 마땅하다. 기소권이 기계적 정의에 매몰되어 인간의 존엄과 형벌의 타당성을 놓쳤음을 보여준다. 과연 초코파이 과자 두 개의 가치가 한 사람의 2년을 저당 잡을 만큼 무거운 것이었나.
이탈리아 대법원의 역사적 판결이 생각난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슈퍼마켓에서 치즈와 소세지 등 4유로(약 5,300원)어치를 훔친 혐의로 기소된 노숙인 로만 오스트리아코프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당시 재판부의 판결 요지는 명확했다. "피고가 가게에서 상품을 점유한 상황과 조건을 살펴볼 때 그가 급박하고 필수적인 영양상의 욕구에 의해서 이를 취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긴급사태에 해당“한다며 생존의 욕구는 소유에 우선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는 법이 단순히 재산권을 보호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생존권이라는 더 상위의 가치를 동시에 수호해야 함을 천명한 역사적 판결이었다. 무엇이 ‘정의’인지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이 판결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소유권이 생존권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는가? 굶주림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경미한 침해를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타당한가? 적어도 이 사건에서 이탈리아 대법원의 판결은 사람을 살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법조문’이 아닌 사람의 ‘양심’이 인간의 존엄을 지켜준 사례였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극단적인 법은 극단적인 불의다(Summum jus, summa injuria)"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법조문을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적용할 때 그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또 다른 불의를 낳는다는 경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피케이아(Epikeia)' 개념을 강조했다. 에피케이아는 ‘정당함’보다 더 우위에 있는 ‘올바름’이라고 정의한다. 즉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법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일반적인 삶의 원칙에 부적합해서 이 괴리를 피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에피케이아’라는 것이다. 적절한 용어로 번역하면 ‘형평’, ‘관용’, ‘헤아림’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법은 모두의 형편과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인 규칙이지만, 우리네 인간사는 법으로 다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삶들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법을 법조문대로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필연적으로 불합리하고 억울한 결과가 발생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법의 엄격함을 완화하고 형병성을 찾는 정신이 필요해진다. 판사가 ‘법관의 양심’으로 재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바로 양심의 문제다. 우리의 양심이 어느 정도의 선까지 관용하고 형평을 따지는지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질 것이다.
초코파이 사건에서 검찰은 무리하게 기소권을 발동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기소유예나 훈방 조치 등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재량권을 포기하고, 굳이 법정으로 끌고 간 것은 무리한 검찰권 남용이라는 비판 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초코파이 하나로 2년의 법정 공방을 하는 것은 낭비다. 고발한 물류회사도 야비하기 짝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에피케이아’를 잃은 사법부의 권력행사이다. 초코파이 하나 먹은 하청업체 직원, 버스비 800원 횡령한 버스 기사에게는 서릿발 같은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하지만 정작 수백억 원의 탈세, 불법 경영 승계, 거대 기업의 담합, 고위층의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하거나 무딘 칼날을 들이댄다. 물론 모든 바늘도둑을 기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수에게 나올법한 그런 도덕적 감정을 사법에서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검찰의 기소권은 사회적 약자나 생계형 범죄가 아닌, 사회의 공적 질서를 파괴하는 '거악(巨惡)'을 향해야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사회 공동체의 근간을 흔들고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카르텔에 대한 무관용 원칙 말이다. 사법부는 사회 시스템을 위협하는 구조적 범죄에는 타협 없는 엄정함을 보여야 한다. 법전에 갇힌 정의가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정의를 보고 싶다. 초코파이 하나의 무게를 재기 전에, 그 속에 담긴 삶의 무게를 먼저 헤아리는 것이 진정한 법의 정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