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 없는 현실가드너] 정원사님은 아파트에 사세요?

따뜻한 정원 판에서 마주한 '정원사'라는 판타지

by 조각보

@Hidcote Manor Garden, England



한 해 사업을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서로 바빴던 탓에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서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물을 여유조차 없었던 지자체 담당자들과 나.



그러다 연말맞이 점심 약속을 잡고 식사를 하던 중, 나에게 훅 들어오는 질문이 있었다.



"정원사님은 아파트에 사세요?"



맛있게 먹은 연잎밥 소화에 전념하던 혈액이 순간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뇌로 솟구쳤다.



내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건 맞는데...

아파트 브랜드를 물어보시는건가?

내가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살면 좀 그렇게 볼까?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자가/전세/월세를 물어보시려는건가?



그렇게 순간적으로 회로를 돌려 나온 답은 정직하게 "네, 아파트에 살아요."였다. 그리고 입을 떼자마자 나의 주거 형태를 묻던 담당자의 눈치를 살핀다.



근데 뭐지...

담당자는 뭔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랬다. 여기는 치열한 이해관계가 오가는 비즈니스 현장이 아닌, 따뜻한 정원(Garden) 판이었다.



담당자분은 내가 당연히 마당 있는 주택에 살며 정원을 가꾸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짐작하셨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의 혈류들은 다시 소화기로 내려가 제 역할을 재개했고, 나 또한 웃으며 대꾸했다.



"일하면서 식물을 너무 많이 봐서, 집에서는 좀 쉬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본질은, 나에게 땅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직업은 정원을 가꾸는 가드너(Gardener)이지만, 정작 내 정원을 위한 땅은 없다.



그래서 나는 남의 정원을 더 많이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 가드너'다.



많은 사람들이 정원이라는 파라다이스를 꿈꾸지만, 현실은 나처럼 땅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비록 콘크리트 속, 아파트에 살더라도 베란다의 작은 화분 하나로, 남의 정원을 산책하며, 또 공공정원의 식물을 가꾸면서 내 땅 대신 이러한 정원 조각들을 부지런히 모아보는거다.



공공정원을 관리하는 시민가드너분들



그러면 비록 내 이름으로 된 너른 땅은 없어도, 발길 닿는 곳마다 수집한 정원의 순간들을 꿰매면 나만의 '조각보 정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땅 없는 정원사라 서글프기보다, 세상 모든 정원을 내 배움터로 삼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 여러분의 일상에는 어떤 정원 조각이 모아졌는가?






글쓴이 : 조각보


직업은 가드너(Gardener)이지만 정작 내 땅 한 평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삽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결핍 덕분에 세상의 모든 정원을 탐닉합니다.


그리고 내 땅이 없기에 더욱 부지런히 여기저기 흩어진 정원의 순간들을 수집합니다. 그렇게 책상 위에 작은 화분부터 타인의 정원에서 건져 올린 초록 조각들을 잇고 기우며, 나만의 넓은 조각보 정원을 기록합니다.


@jogak_bo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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