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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Feb 08. 2019

가족이 지옥이 될 때

내가 아는 건 오직, 당신을 모른다는 것뿐

알고 있다는 믿음으로 관계는 유지된다.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외롭다고 느끼도록 설계된 사피엔스는 타인을 곁에 두기 위해 그를 ‘알고자’ 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잘하는지, 못하는지, 바라는지, 피하는지. 알지 못하면 곁에 두는 일이 수월하지 않고, 곁에 두는 일이 수월하지 않으면 관계는 깨진다. 그러나 깨지는 관계보다 더 무서운 건 지옥이 되는 관계다. 알고 있다는 믿음이 넘쳐, 결코 알 수 없다는 자각을 해본 적이 없는 관계.
 
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들은 밖에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지만, 희한하게도 ‘가족’이라는 역할에 투입되는 즉시 나사가 하나 빠진 가전제품처럼 잡음을 낸다. 이들이 잃어버린 나사는 ‘누굴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지극히 소박한 상식이다. ‘나는 당신을 안다’는 전제는 ‘저 인간 또 시작이다’로 이어진다. ‘또’가 핵심이다. 나는 당신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사고와 행동은 나의 프레임 안의 그것이다. 즉, 당신은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지긋지긋한 게 과연 당신인가.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인 적이 없는데. 내가 당신을 낳았어도, 당신이 나를 낳았어도, 아니면 당신과 내가 누굴 같이 낳았어도, 나는 당신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무슨 근거로 ‘당신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것은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 아닌가. 오래된 어느 날, 당신을 거칠게 욱여넣고, 한 번도 업데이트하지 않았던 그 프레임.



우리는 죽어도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가 어떤 인간인지 다 알 수 없다. 그 ‘무지’의 수준은 어쩌면, 점심시간을 쪼개 들른 은행에서 내 바로 앞 대기표를 뽑고 존나 긴 상담을 그칠 줄 모르던 사람의 뒤통수에 꽂히는 종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은행 창구에서 인생 상담을 하는 듯한 그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가,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좀 생각해서 작작 좀 하시죠’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는 가능하면,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기대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가 빨리 나가줘서 내 차례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아서, 점심시간이 몽땅 지나가고, 다시 내일 점심시간을 기약해야 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그의 멱살을 잡고 은행 창구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 은행 문을 나서며 다만,


오늘은 운이 나빴네, 할 뿐이다.
 
그러나 포악한 아버지에 대하여, 속된 어머니에 대하여, 막돼먹은 아들과 망동하는 딸에 대하여, 우리는 난동을 참지 못한다. 그게 부모가 할 소리야? 자식새끼가 얻다 대고! 오랜 시간 업데이트하지 않은 ‘나의 프레임’ 안에 구겨진 그들에게 우리는 요구한다. 부모로서 부모답기를, 자식으로서 자식답기를. 제발 지긋지긋한 짓 좀 그만하기를. 도무지 우리는, 은행에서 그랬듯이, 인내와 교양을 갖추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건, 은행에서와 다르지 않은데도.

그리하여 우리는 외워야 한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서로에게 복창해야 한다. 내가 아는 건 오직, 내가 당신을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기대를 품고, 실망하고, 심지어 난동을 부리는 일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따라서, “이제껏 살아왔으면서 나를 그렇게 몰라?” 따위의 언설도 금물이다. 모른다. 모르니까 설명해주고, 초면인 것처럼 경청하라. 알고 있다는 믿음을 부수고, 끝내 알 수 없다는 자각을 반복하지 않으면, 지옥은 깰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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