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와 그린북으로 읽는 악의 평범성

빌라도와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과 비도덕적 사회

by Johan Na

'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흔히 뿔 달린 괴물이나 사이코패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악은 생각보다 훨씬 평범한 얼굴로 우리 곁에 존재하며, 그 평범함 속에서 우리 역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아이히만과 사유의 부재: 생각을 멈춘 순간의 위험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놀라운 사실을 마주한다. 600만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실무 책임자가 광기 어린 괴물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던 '성실한' 관료였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아렌트가 지적한 핵심은 '사유의 부재(thoughtlessness)'다. 이는 단순히 지능이 낮거나 고민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 계획을 세우며 머리를 굴렸고, 승진을 위해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이 일이 옳은가?", "내 명령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멈춰 서서 돌아보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아이히만은 바로 이 능력을 포기했다. 그는 자신의 서명 하나가 수만 명에게 어떤 고통을 줄지 상상하지 않았고, 기계적으로 법과 명령을 수행했다. 이 '사유의 포기'야말로 가장 무서운 악의 형태였다.


영화 <헬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영화 <헬프>(2011)는 1960년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이 '악의 평범성'이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니버는 "개인의 도덕성이 집단의 도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개인적으로는 선하고 양심적인 사람들도 집단 속에서는 이기적이고 억압적인 행동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 백인 여성들이 바로 그 증거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선을 베풀고 이웃에게 친절한 '도덕적 개인'들이다. 하지만 '백인 상류층'이라는 집단에 속하는 순간, 그들은 흑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비도덕적 사회'의 일원으로 변모한다. 특히 악역 힐리는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다. 그녀는 '위생법'이라는 명분으로 차별을 시스템화하는, 악의 설계자이자 확신범이다. 더 큰 문제는 그녀 주변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힐리만큼 악랄하지 않지만, 사교계의 평판과 집단의 압력 때문에 침묵한다. 개인의 양심이 집단의 논리에 굴복한 것이다. 이는 니버가 말한 집단의 비도덕성이 어떻게 개인을 잠식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혼자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집단 속에서는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영화 <그린 북>: 집단적 편견을 깨는 개인의 만남

영화 <그린 북>(2018)의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 역시 초기에는 비도덕적 사회의 관습에 젖어 있던 인물이다. 그는 흑인이 사용한 유리잔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차별을 '상식'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흑인은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저 혐오해야 할 집단이었다.하지만 토니는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의 여행을 통해 변화한다. 이 변화의 핵심은 '개인 대 개인'의 만남에 있다. 토니는 셜리라는 고유한 인간과 교감하며, 사회가 주입한 편견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깨닫는다. 이는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회복 과정이기도 하다. 토니는 멈춰 서서 생각한다. "내가 배운 것이 정말 옳은가?", "저 사람도 나처럼 아픔을 느끼는 인간 아닌가?" 이렇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그는 비도덕적 사회가 씌운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


빌라도의 방관과 우리의 선택

다시 아렌트의 시선으로 돌아와 보자. 역사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유형의 인물, '본디오 빌라도'를 만난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았음에도 군중의 압력에 밀려 십자가형을 승인했다. 그는 대야에 물을 떠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무죄하다"고 선언했지만, 그것은 비겁한 방관일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빌라도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빌라도가 소극적으로 불의를 용인했다면, 아이히만은 법을 지키는 모범 시민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악에 가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뿌리는 같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집단의 광기에 자신을 맡겨버린 '사유의 부재'다.


나가며: 세숫대야를 엎어버릴 용기

악인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빌라도의 순간을 마주한다. 니버가 말했듯, 집단의 힘은 강력하고 개인의 양심은 연약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치열한 사유가 필요하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위에서 시키니까"라는 핑계로 비도덕적 사회 뒤에 숨을 때, 악은 우리 곁에서 평범한 얼굴로 자라난다.

"악은 결코 근본적이지 않고, 다만 극단적일 뿐이다. 악은 깊이도 없고, 악마적인 차원도 없다. 악은 곰팡이처럼 표면에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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