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김부장의 변화: 아비투스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사다리에서 내려온 자유

by Johan Na


"송과장! (경차를 보며) 소박해, 검소해, 참 보기 좋아!"

김 부장의 이 한마디에는 단순한 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선언이, '나는 너보다 위다'는 확인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를 거대한 경기장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모두 이 '장(Field)' 안에서 각자의 자본을 걸고 경쟁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혹은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드라마 속 김 부장의 삶은 바로 이 게임의 전형이었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고급 세단 풀옵션. 그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증명해왔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의 실체가 드러났다.


몸에 새겨진 계급의 언어

김 부장이 송 과장의 국산차를 비웃고, 지방 공장 직원들을 하대했던 행동. 이건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차로서 혹은 직급으로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있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길러진 성향의 체계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판단의 기준이자, 몸에 새겨진 계급의 언어다.

김 부장의 아비투스는 '대기업, 서울 자가, 명품 가방'이라는 상징들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에게 경기도 아파트나 경차는 단순한 지리적 위치나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자신의 우월한 취향과 지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반드시 '구별 지어야 할'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라. 무의식중에 누군가의 옷차림, 말투, 사는 동네를 보며 그 사람을 '분류'하거나, 옷이나 시계의 명품 로고를 보며 안심하던 순간들. 그것이 바로 아비투스다.

김 부장이 타인을 깔보는 행위는 의식적인 악의라기보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아비투스의 반사작용에 가깝다. 물리적 폭력은 아니지만, 시선과 말투만으로 상대에게 열등감을 주입하고 위계를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이다.


우정으로 포장된 투자의 비극

부르디외는 사회자본을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동원 가능한 자원의 총합'이라고 정의했다. 쉽게 말해, '내가 누구를 아느냐'가 곧 나의 힘이 되는 구조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핵심은 냉혹하다. 인간관계가 자본의 축적을 위한 '투자'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김 부장의 비극은 이 냉정한 논리를 따뜻한 '우정'으로 착각한 데서 시작된다.

백 상무와의 관계

김 부장에게 백 상무는 단순한 직장 상사가 아니었다. 그는 백 상무와의 수직적 관계를 끈끈한 '의리'이자 '형제애'라고 믿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주말 골프, 가족 모임까지. 그는 진심으로 백 상무를 '형님'이라 불렀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시각에서 이것은 철저한 '오인'이다. 김 부장이 백 상무에게 쏟은 시간과 감정 노동은 실제로는 자신의 조직 내 위치를 유지하거나 높이기 위한 사회자본 투자였다. 백 상무에게 김 부장은 필요할 때 활용하는 '인적 자원'이었으나, 김 부장은 그것을 '인간적 유대'라 믿었다. 자본으로서의 효용이 사라졌을 때 관계가 소멸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김 부장이 회사를 떠나자마자 백 상무의 전화는 끊겼다.

동료들과의 관계

도 부장 같은 동료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다. 김 부장에게 동료는 함께 가는 '친구'가 아니라, 한정된 임원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자'였다. 그는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었다(우정의 외양). 하지만 돌아서서는 그들의 인사 고과와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비교했다(구별짓기의 실재). 우정이 싹틀 수 있었던 수평적 관계조차, 그에게는 '내가 뒤처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도구'로만 소비되었다.

진짜 관계는 어디에 있었나

아이러니하게도 김낙수 부장이 회사라는 '장'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그제야 진짜 관계가 무엇인지 드러났다.

자본의 논리로 계산되지 않았던 건물주 친구.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입시에 실패하고 변두리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형.

김 부장이 그토록 무시했던, 사회자본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그 관계들이야말로 그를 지탱하는 실존적 토대였다. 결국 김 부장의 내려놓음은 '투자로서의 인간관계'가 파산했음을 인정하고, '존재로서의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게임을 거부한 사람

부르디외 이론의 가장 비극적인 점은, 피지배계급뿐만 아니라 지배계급(혹은 그것을 욕망하는 중간관리자) 역시 자신의 아비투스에 갇혀 산다는 것이다.

김 부장은 남을 무시함으로써 우월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더 많은 자본을 가진 백 상무나 도 부장 앞에서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자신을 검열해야 했다. 지배하는 자도, 지배받는 자도 모두 불행한 게임. 그것이 구별짓기의 본질이다. 김 부장의 변화는 이 '구별짓기 게임' 자체에 대한 거부였다.

그는 더 이상 백 상무라는 사회자본에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음으로써 얻는 얄팍한 상징적 이익을 포기했다. 서울 자가와 직함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물론 타의에 의해서였지만), 그것은 사회가 강요한 욕망의 구조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제 그는 타인을 '자원'이 아닌 '존재'로 바라본다.


구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사는 곳, 내가 마시는 커피,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남들과 나를 '구별'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백 상무 같은 인맥을 관리하며 피로감을, 때로는 자괴감을 느낀다.

김 부장이 보여준 진정한 자유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다리에서 내려와, 남과 나를 나누던 구별의 선을 지우는 것이었다.

아비투스라는 무의식의 감옥을 깨고 나온 김 부장. 그는 이제 백 상무의 인정도, 동료를 향한 우월감이나 열등감도 필요 없는 온전한 '김낙수'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비교하고 있는가, 누구를 통해 나를 증명하려 하는가. 관계들은 진짜 관계인가, 아니면 투자인가.

우리의 자유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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