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이 남긴 다정한 징후들

한 치수 큰 속옷과 느슨해진 마음의 변화

by 꿈에서본시인

앞자리의 숫자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어떤 나이를 기점으로 건강이나 운동 같은 단어들을 부적처럼 꺼내 들곤 했다. 마치 그 단어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삶의 균형이 무너질 것처럼, 그들은 절박하게 '관리'라는 키워드를 거들먹거렸다. 젊음이라는 견고한 방어막 뒤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신체의 미세한 균열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날 때, 세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가올 것이라던 그들의 충고가 문득 떠올랐다. 현실은 드라마틱하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그 무던한 변화 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직감은 그 어떤 경고보다 육중하게 다가왔다. 이제야 그 말들이 납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나 또한 단순한 수치적 계산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이'라는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음을 실감케 한다.


최근 평소보다 한 치수 큰 속옷을 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한 체형의 변화를 넘어, 내면의 결조차 스멀스멀 뒤틀리고 있음을 알리는 몸의 신호였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삼키던 음식들이 입안에서 머뭇거려졌다. 혀끝에 닿는 질감부터 위장에 머무는 무게감까지, 선택하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몸이 그것을 밀어내는 감각. 소화되지 못한 문장들이 명치끝에 걸려 있는 것처럼, 내 몸은 이제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매일 임상 실험을 거듭해야 하는 연구실이 되어버린 듯하다. 무엇이 적절한지, 무엇이 나를 해치지 않는지 하나씩 대조해 가며 사용법을 익혀야 하는 초보자가 된 기분이다. 수십 년을 이 육체라는 집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장 중요한 '나'라는 존재의 사용설명서를 분실한 채 고독하게 방황하는 여행자가 되어 여기 서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 궤를 같이한다. 인간관계의 허무함은 늘 내 마음 기저에 고여 있던 익숙한 감각이었으나, 이제는 그 허무조차 무던함이라는 단단한 껍질로 덮였다. 예전 같았으면 상처가 되었을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에 대해, 이제는 지나가는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화초나 우직한 아름드리나무를 마주하듯 그저 예상치 못한 조우를 있는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된 여유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를 갈구하던 피로감을 내려놓고, 처연하지만 담담하게 그저 제자리에 존재하는 것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문득 삶이 무겁다고 느낀다. 살아있다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그 의미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고개를 든다. 시간의 관념 또한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지나온 날들과 지내야 할 날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기록들이 순차적인 선 위에 놓여 있지 않고 한데 뒤섞여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것은 혼돈이라기보다는,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거대한 질서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밀도 있게 교류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시간은 선형적인 흐름을 벗어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교차하며, 나라는 존재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불안 사이 그 어디쯤에 묶어둔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통제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강렬하지만, 그것을 영원히 움켜쥘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장악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무력하고 게으른 욕심이었는지를 깨달으며 혼자 헛웃음을 짓는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지만, 한심해 보일 수 있는 그 욕망조차 아주 작은 담요로 살포시 덮어두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아래서 잠시나마 평온하게 숨 고를 수 있도록 말이다.


소유에 대한 갈망은 이제 대상의 이동을 가져왔다. 특가세일이나 하나를 더 얹어준다는 프로모션, 시간제한의 쿠폰과 스페셜 혜택이라는 강렬한 마케팅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거저 주는 것 같은 인상이나 지금 아니면 못 산다는 가격 협박에 쉽게 매료되곤 했으나, 이제는 그 실체가 도달했을 때의 부피감과 무게감을 먼저 헤아린다. 화면 속의 숫자는 평면적이지만 실체가 되어 현실에 도달한 물건들은 예상보다 훨씬 육중한 존재감으로 나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방향이 바뀌니 소음 가득한 호객 소리와 순간의 화려함에 부여했던 과중한 의미들이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야말로 벼랑 끝 난간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일이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던 시절보다 생각은 깊어졌을지 모르나, 정작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중심은 더욱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유동적으로 변하는 가변성이 나의 본질인지, 혹은 그 중심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예감할 뿐이다. 나의 중심 또한 타인의 시선과 내 안의 감각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오랜만에 봄이 온다는 핑계로 꽃 한 다발을 사서 식탁 위에 올렸다. 주황빛을 머금은 자두색 꽃봉오리가 붉은 결의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매끈한 표면을 가진 그 봉오리가 아직은 쌀쌀한 바깥공기에 몸을 웅크리고 있더니, 온기가 허공을 넘나드는 집안의 포근함에 잎사귀를 살랑거리며 제 몸매무새를 고쳐 잡았다. 수줍게 고개를 든 꽃잎 사이로 미세한 향기가 배어 나온다. 마음만 먹으면 계절의 입구에서 꽃 한 다발을 화병에 꽂아둘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 나는 그렇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삶의 문턱을 넘고 있다. 그것은 화려한 성취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만의 속도로 계절을 맞이하는 법을 익힌 자세이기도 하다.

꽃은 일주일 정도 지나면 아름다운 자태를 지워버리고 시간이라는 의미를 제 몸속에 그대로 담아 모습을 감춘다. 이런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죽어가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 아등바등한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꽃병 위에 놓인 자그마한 정적에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누군가 관광지 혹은 산 정상에 "나 여기 있었다"라고 슥슥 적어두는 서툰 낙서처럼, 나 역시 기록을 통해 내가 여기 있었음을, 이 순간의 공기를 호흡했음을 붙잡아둔다.


타인에게 나를 이해받으려는 희망은 어쩌면 빛바랜 유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각자가 가진 감각의 예민함이 다르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유전적 지도가 다른 상황에서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에 가까운 사자성어일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붙잡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근거를 잃어버리는 방랑자처럼, 나는 오늘도 자두색 꽃봉오리 앞에서 문장을 고른다. 이 정적인 기록들이 훗날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서가 되어주길 바라며, 나는 이 낯선 감각을 붙잡고 기꺼이 살아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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