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퓨리도, 닐 윌리암스도 아님
소설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지만 이 소설을 쓰면서 느낀 점이 한 가지 있다.
어떤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신기해서’ 쓰기 시작한다. 그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즐겁고, 그 안의 인물과 사건, 세계가 형성되는 모습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또 욕심이 생겨서, 내가 만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고, 더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기대가 헝클어지고 때로는 내가 만든 이야기가 무의미하거나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사이클을 계속 반복하는 일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겁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다가도, 갑자기 자기 소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런 건 왜 쓸까? 이것이 정녕 의미가 있는 이야기일까?
그리고 소설이 마지막에 이르는 순간,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소설에 담긴 모든 것들이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내게 정말 중요한 이야기들, 이 세상과 관련된 것들, 나와 관련된 것들, 내 가치관, 내 생각, 내 감정, 그리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소설 안에 담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내 이야기’라는 것을.
소설가는 ‘남의 이야기’인 척하고 쓰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상한지,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꼴사나운지, 이런 것과는 관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애착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똑바로 직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무엇이 되어도 이 소설은 현재의 나를 벗어나기 어려운 작품이며, 그러기에 지금의 나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게 또, 흔적을 남기고 가는구나. 나라는 흔적을……. 결국 그런 것이다. 그런 것.
소설을 더 끌어안고 쓰고 손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시간이 부족해서, 직장인이라서, 이런 변명을 떠올려보지만, 결국에는 인내심 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일단 내놓고 그다음에 고친다. 언제 이 나쁜 습관이 고쳐질 것인지. 다음에는 더 나은 글을 써보겠다 다짐하며, 또 하나의 이야기를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