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지는 거리를 걷는데 어둠이 먼저 와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세한 먼지 입자는 정신 사이로 스며들고, 여인은 강아지를 안고 단풍 진 얼굴로 나를 스쳐 지나간다. 주어진 시간 안에 달려야 하는데, 덜컹거리는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훼방하고, 그리하여 나는 시간을 해방한다. 어디든, 어떻게든 내게서 멀어지라.
비등점(沸騰點)으로 폭발하려는 얼굴로 버스에 몸을 싣는다. 별들은 보이지 않고 하늘은 장막 같은데, APT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불빛, 별빛보다 더 밝다. 그 아래 안전하고 각진 집들을 모아 사람들은 그것을 소망이라 부르는데, 버스는 구불구불 길을 가며 사람들을 긁어모은다. 오래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며 승객들은 쓸개 즙을 모아 엉엉 울기 시작하고, 낙선(落選)한 희망은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이냐, 잘 닫아둔 텀블러처럼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세이렌의 노래를 부른다. 절망을 유혹하는 감미로운 노래를.
허물을 벗는 뱀처럼 버스를 벗어버리고 정류장에 앉아 다음 허물을 기다린다. 겨드랑이가 간지러운데 돋아나는 건 뱀 비늘? 구름도 잘 저금해 놓으면 용(龍)이 밟고 승천을 한다는데 하늘에는 역린(逆鱗) 같은 초승달, 항공기가 저가의 운임(運賃)으로 스쳐 지나간다.
발을 동동거리며 낯선 얼굴들 틈에 섞여 낯선 감정들과 몸을 섞고, 낯선 기대를 기워 입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환멸에는 어떤 공식도 존재하지 않기에,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하려 나는 더욱 서걱대는 시어(詩魚)들을 몰아 공기 속을 헤엄친다. 이곳은 엉뚱한 정류장, 흐름을 놓친 강물처럼 나는 시간을 역류(逆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