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12 벼랑 끝에서, 담담하게

나는 그렇게 담담하게 이겨냈다. 그래서 아직, 여기 서 있다.

by Johnn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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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터리- 편하게 쓰기로 했다. 잘 만들어야한다는 부담도, 띄어쓰기 하나조차 강박적으로 고쳐서 완벽할 때만 내놓으려는 고집도 살짝 버리고. 편하게. 그냥 그때 겪었던 나의 이야기들을:)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으니. 나만 좋으면 됐지 뭐. 새로운 독자도 생겼고 말이다.


타이페이에 일단 잘 안착한 게 다행이었다. 가진 현금은 별로 없었지만 공짜로 지낼 곳과(물론 노동과 기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엽서를 판매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주변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은 안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물론 아무리 번화가라고는 해도 거리에서 뭔가를 판다는 게 순탄치는 않았지만 대만 사람들의 천성 자체가 부드럽고 유쾌하다는 점은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지내게 된 호스텔의 스탭 친구들과도 금방 친해졌고 말이다.


일단 가오슝으로 가기 전에 약속한 사진작업을 먼저 진행해 놓은 터라, 그곳에서 지내는 것 자체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거니까 말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본 후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바뀐 것도 느껴졌다. 물론, 이전에도 살갑고 친절했지만 약간의 존경심과 고마움이 더 섞인 느낌이었다. 스탭 친구들은 한국 손님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렀고, 그때마다 나는 쪼르르 달려나와 통역을 도와주곤 했다. 통역 이외에도 이런저런 조그만 일들을 도와주며, 낮에 일하는 Marrie와 Marcy 그리고 야간에 일하는 Henry와 Rice 모두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갈 수 있었다. 다만, 태어나서 뭔가를 판매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정작 엽서 판매실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거리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내 엽서가 그리 끌리지 않아서였을까. 타이페이 역에도 가 보고, 큰 피켓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엽서를 팔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음에도, 여행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디든 돌아다녀야, 대만 여행엽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종일 엽서만 팔자니 사진작업이 안 되고, 사진작업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에 집중하자니 엽서를 팔 수가 없었다. 교착 상태. 벗어나기 힘든 딜레마였다. 어떤 쪽으로든 결단을 해야만 했고, 나는 여행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결정적인 실패의 요인이었고, 준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행을 다녀온 지 2년째가 되는 지금, 굳이 내가 이 실패한 여행 프로젝트의 회고록을 완성시키는 이유도 그거다. 인적 네트워크, 자본, 기획력.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꾸는 꿈은, 아무리 멋진 것일지라도 빈꿈이란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적은 예산을 가지고 무모한 프로젝트에 홀로 뛰어들 수 있는,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결단력과 실행력의 조화를 갖추게 될 테니까 말이다.


돈도 돈이었지만, 청소년기에 치료하지 못했던 우울증이 슬그머니 발목을 잡았다. 당장 조여오는 잔고의 압박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는 있었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 검은 무언가는,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이야기를 귓전에 때렸다. 그래도 나는 버텨내고 있었다. 버텨야만 했고 말이다. 물론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그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내게 오늘 이 순간은 없었을 것만 같다. 언제라도 깨지고 무너져서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설 뻔 했던 일이 몇번이나 있었고,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부모님과 떨어져 있기로 결정한 것은 아주 좋은 결정이었다. 내 삶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나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됐고,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과, 좋은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곳이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엽서는 잘 팔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틈을 내서 거리로 나갔다. 내게 관심을 갖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나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세계를 여행하는 아르헨티나 커플도 봤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리는 글들도 조금씩 반응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프로젝트의 유일한 진행자인 나조차도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한국에서 시달리다가 말라죽느니, 여행이라도 다니다가 굶어죽는게 좀 더 낫겠다 싶었던 것뿐이다. 심리적 상태도, 재정적 상태도 보호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자구책을 찾으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라도 살아남은게 용하다 싶기도 하면서, 나 자신이지만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어떤 선택이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나는 당장 상담을 받으러 갈 돈은 없었기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덕분에 인생 공부를 또래 친구들보다 먼저, 많이 하게 됐지만, "보통 20대”들이 다들 겪는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스물 한 살에 학생이 아니라 연사로 대학교 강의실 강단에 섰을 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두려움과 아쉬움이 섞인 복잡미묘한 생각은 아직도 생생하다. 왠지모르게 난 저 학생이 앉은 저 자리에 앉을 수 없을것만 같았고, 내가 가진 독특함이 "보통의 존재”속에 잘 어우러지지 못하게 만드는 독이 될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괜히 혼자 복잡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자퇴, 조기졸업, Gap Year, 우울증, 여행. 나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다 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도 든다. 스무 살, 4월, 대만. 모든 방면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 상황에서 나는 엽서를 팔고 있었다. 아니,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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