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cekim Dec 13. 2020

작은 세상

열세 번째 엽편소설

그녀는 가끔 낙산 공원에 올랐다. 대학로와 맞닿아있지만, 꽤 높아서 그녀는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가끔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들어오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그녀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곤 했던 밤의 낙산공원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주로 그녀가 그곳에 나타나는 시간은 늦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대였다. 그녀는 대학로의 많은 가게들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과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지나, 한적하고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낙산공원의 계단을 마주하곤 했다. 그녀는 처음 이 곳에 오던 때부터 지금까지, 긴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성벽이 보이며 원하는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는 묵묵히 앞을 보고 걸었다.


목적지에 도달한 그녀는 조용히 성벽 근처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사이로 난 작은 문 옆에는 벤치가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거기에 앉아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다. 도심의 경치를 즐긴다기보다, 그녀는 그 시간에 세상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매일 다니는 거리,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 좋아하는 카페가 분명히 보이는 그 시간과 그 거리가 정말 좋았다. 그렇게 앉아서 살짝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 것이 그녀에겐 중요한 일정이었다. 그녀는 보이는 모습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천천히 눈으로 훑다가, 주머니를 뒤져 작고 얇은 책을 꺼내 읽다가 알람이 울리면 천천히 일어나곤 했다. 그녀는 그렇게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지만, 매일이나 매주가 아닌 불규칙한 날짜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곳에서 마주치는 누구도 그녀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새 책의 모서리,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잔의 경계 부분, 예쁘게 접힌 봉투의 선 같은 것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가 일할 때 입는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묶거나, 일이 끝난 후 머리를 풀고 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 자신이 분명하게 달라지는 지점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그런 성향은 그녀가 매일 접어서 선을 그어둔 종이들에서도 드러났다. 그녀는 매일 종이를 삼 등분으로 접고 구분 선을 그린 다음, 칸마다 이름을 적고 그 아래에 시간 선을 그렸다. 시간선에 맞추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있는 것들 뒤에 하나씩 선이 그어져서 마침내 모든 열에 표시가 끝나면 그녀도 미련 없이 그 종이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곤 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매일 분명히 구분해 넣는 종이와 선, 글씨의 정렬은 종이 밖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시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그 날 낮의 그녀는 유난히 맑은 하늘을 마주한 낙산 공원에 꽤 오래 머물렀다. 그저 전보다 밝고 구름 없는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왜 눈물이 나고 있는지 그녀는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어제 던져버린 종이와는 다르게 종이에 담긴 일들은 그녀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어제의 종이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던져 넣은 종이들이 그녀의 마음 안에 모두 남아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녀가 매일 적어 넣는 이름들은 결국 그 이름의 주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매일 종이에 깨알같이 적는 것들이 이름의 주인을 위해 하는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이름의 주인을 지켜내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지키지 못한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가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종이에 적힌 일들을 해냈더라면 그들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했다.


공원에 찬바람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자, 그녀는 이제 멍투성이인 다리를 가리려고 긴바지를 입어도 덥지 않은 계절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녀는 매일 그녀의 깨끗하고 조용한 글씨와는 다르게 급하게 뛰어다녔고, 그녀가 지키려는 이름을 위해 설치된 많은 장치들과 비품들 때문에 다리에 늘 멍이 새로 생기곤 했다. 이제 더 추워지면 이 곳에 올라와 앉아있는 일도 하지 못하게 될 테니 그녀는 아쉬워했고, 그 날따라 내려가야만 하는 시간을 알리는 알람은 일찍 울리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내려가야 했다. 그녀는 핸드폰 달력에 날짜마다 쓰인 글자들 중 'E'가 있는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다음의 'E'는 다음 주 화요일이었다. 그녀는 다음 주 화요일까지 너무 추워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마음처럼 말라버린 낙엽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유니폼을 입고 종이를 접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동료는 그녀가 없는 사이 누군가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분명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설렘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슬그머니 외투에 그 편지를 넣어두었다. 그녀의 동료도 별 일 아닌 듯 편지를 건넸지만, 그녀가 바로 그 편지를 열어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와 다른, 분명하고 정확해야만 하는 자신을 꺼내 일해야 하는 순간에는 그 편지를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애써 동료의 눈빛을 모른 척했다. 오늘의 이름들을 깨끗한 종이에 적는 순간부터 모든 선을 그려 넣고 종이를 버리는 순간까지 그녀는 편지에 대해 잊기가 어려운 것 느꼈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 오늘의 이름들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매일 적는 이름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는커녕 자기 이름조차 말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그래서 가끔 칭찬카드가 들어오는 일은 있어도 편지가 오는 상황은 매우 낯설었다. 편지 봉투에는 아무 이름도 쓰여있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불만이나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하는 마음도 피어났지만, 그렇다기엔 편지 봉투는 매우 신경 써서 고른 듯 비싸 보였다. 굳이 욕하려는 상대에게 사서 줄 것 같지는 않은 봉투였다. 설렘과 일하는 자아 사이에서 8시간 이상을 버텨낸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혼자가 된 순간 바로 그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봉투만큼이나 신경 쓴 듯 예쁜 편지지를 펼친 순간, 그녀는 맨 위에 쓰여있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그녀가 한동안 종이에 여러 번 반복해서 적어내렸던 이름, 잊기 어려운 아이의 엄마에게 온 편지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알고 편지를 보냈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잘못한 것이 없는지 생각해본 뒤에야 그녀는 다음 줄을 겨우 읽을 수 있었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그렇게 힘든 글은 그녀 인생에 처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꾸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처음으로 받은 그 편지를 적시고 싶지 않아서 겨우 참으며 읽는 행위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한동안 지켜냈던 그 아이가, 세상에 더 이상 없다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그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길바닥 위에 주저앉아 우는 그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더 이상 그녀의 감정을 막기 어려웠다. 그 아이가 떠났다는 문장 뒤에는, 그동안 그 아이를 지키고 사랑해준 그녀에 대한 감사가 적혀있었다. 그녀는 평생 이 편지를 써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저 몇 달 동안 그 아이의 사투를 지켜봤던 그녀의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며 원망의 말이 아닌 감사의 말을 쓸 수 있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적어 내린 많은 아이들 중 그 아이를 특별히 기억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보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고 집에 무사히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낮은 아이인데도 아이 엄마가 늘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눈빛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랑을 줬음에도, 수술 후에는 다른 병동으로 갔기 때문에 내심 그녀는 적은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지만,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그녀는 먹먹한 마음을 이기기가 힘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집에 가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늦게까지 불이 켜진 낙산 공원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하나 둘 불이 꺼져가는 상점가 위로 밝게 불이 켜진 낙산공원 외에는 그녀가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이 속죄가 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전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낙산 공원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에서 새벽으로 가는 그 시간에, 공원은 고요히 불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늘 앉아있던 자리에 쪼그려 앉아, 그녀는 늘 보던 하늘과 풍경을 보았다. 낮에 봤던 푸르고 깨끗한 하늘이나, 분명하게 보이던 그녀의 삶의 반경은 어둠과 인간이 만든 불빛의 싸움 사이에 흐려져 있었다. 그녀는 빈 마음을 텅 빈 하늘로 채우려는 듯 고개를 젖혔다. 한참을 그렇게 취객처럼 널브러져 있는데,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별이 그녀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는 고흐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럼 그녀가 떠나보낸 아이들도 보이지 않지만 저 하늘 어딘가에서 이 세상을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별에서 이 세상을 본다면,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삶의 흔적들보다도 더 작고 넓은 세상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받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그 아이의 엄마는, 더 이상 아이가 아프지 않고 행복한 곳에서 자기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래도록 그 아이를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 말은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의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래도 그 마지막 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오늘 발견한 별에게 기도했다. 기도인지, 질문인지, 그녀의 소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아프지 않고 행복해달라는 말을 그녀는 계속 반복했다.


고요하고 작은 세상을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천천히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다 발견하지 못한 별들이 저 어둠 속에서 이 작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이 들자, 그 세상이 너무 크고 무겁게 느껴질 때면 다시 이 곳에 와서 별에게 말을 걸어야겠다는 이상한 논리와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작은 세상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가끔 밤의 낙산공원에도 출몰하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섯 엄마와 다섯 개의 이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