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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Feb 13. 2021

좋은 주말

열네 번째 엽편소설

그녀가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를 영화관이나 서점이나, 좋아하는 카페가 아닌 그 빨래방에 앉아 보내게 된 것은 그녀의 계획과는 매우 다른 일이었다.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을 텐데도 동네에 빨래방이 생기는 일에 대해 내심 그녀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이 그곳에 앉아 돌아가는 세탁기를 멍하니 보는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금요일에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토요일에 늘어지게 늦잠을 잔 뒤에 서점에 가서 신간 소설을 사서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읽는 게 좋을지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는 게 좋을지 한참 고민을 했던 그녀였다.


모든 일의 시작은 금요일의 예상치 못한 야근이었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일주일의 피로가 몰려와 그날따라 졸렸지만, 내일이면 주말이란 생각에 예상한 것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오후 5시를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조용한 사무실에서 내적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팀장님의 쪽지를 보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한 금요일이었다. 하지만 차마 모른척하지 못하고 팀장님의 쪽지와 첨부파일을 본 순간부터 그녀는 엉덩이 한 번 떼지 못하고 창 밖이 어두워지고 사무실에 다른 이가 남지 않는 시간이 되어서야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혼자 사무실 불을 끄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맞은편 고깃집의 연기와 함께 술쟁이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고, 모든 짜증과 스트레스가 피로로 이미 승화된 상태였던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며 이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이미 옷에 밴 땀냄새나 술냄새, 고기 냄새로 가득한 만원 지하철을 타면서 그녀는 토요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육체가 아닌 영혼이라도 행복한 상상 속으로 보내기 위해 애썼다. 기분이 들뜨는 새 책 냄새를 맡고 싶었고, 깨끗하게 정리된 대형 서점에 가고 싶어 졌다. 그리고 새 책을 한 권 골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지난달에 발견한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브런치 메뉴로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커피 향을 맡으며 단 것을 입에 마구 넣으며 새 책을 읽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터질 듯이 밀려들어오는 지하철의 사람들에 대한 짜증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금요일의 뜻밖의 야근과 술쟁이 지하철을 뚫고 집에 왔지만, 그녀가 원룸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애써 눌러왔던 모든 피로와 짜증과 부정적인 감정이 폭발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부엌에 딸려있는 세탁기에서 거품과 물이 잔뜩 흘러나와 그녀의 작은 독서 공간에 놓인 카펫에 얼룩을 만들어 둔 데다, 아침에 급하게 출근하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이불 끄트머리까지 적셔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그게 몇 시간이나 되었는지 온 방에 습기가 차서 수족관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으며 창문을 열고, 이불 커버를 벗기고, 카펫을 접어서 비닐봉지에 쑤셔 넣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원룸에는 그다지 큰 봉투가 없었고, 결국 장 볼 때 쓰려고 산 접이식 카트를 펼쳐 얼룩진 카펫과 이불 커버를 대충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바닥에 흥건하게 남은 물을 걸레로 밀며 관리실에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보니 날짜가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바뀐 지 오래된 깊은 새벽이었다. 지친 몸을 일으켜 겨우 씻으며 그녀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카펫을 깔 수 있는 사이즈의 방을 얻으려고 오래된 건물로 이사 온 것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세탁기에 퇴근시간에 맞춰 예약 빨래를 걸어둔 것이 잘못이었는지, 퇴근 시간도 예측 못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잘못이었는지를 따져보다가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만 화장실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결국 끄트머리가 여전히 좀 축축한 이불솜을 대충 덮고 누운 그녀는 내일 눈이 부으면 서점보단 캄캄한 어둠 속으로 숨을 수 있는 영화관이 좀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잠에게 스스로를 맡겼다. 그리고 눈을 뜬 것은 토요일 오전이 끝날 즈음의 시간이었고, 그녀의 침대에서 일어나자 보이는 카트에 쑤셔져 있는 이불과 카펫이 풍기는 존재감은 서점이나 영화관에 대한 원래 계획을 생각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카트에 엉망으로 들어가 있는 카펫을 노려보며 관리실과 통화한 그녀가 들은 대답은 기대와 달리 어쨌든 주말까지 세탁기를 쓸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그녀는 결국 읽던 책 한 권을 위로 삼아 들고 동네 빨래방까지 카트를 끌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미드나 영화에서만 봤던 빨래방에 처음 와 본 그녀는, 처음 보는 사이즈의 세탁기와 건조기에 먼저 당황하고, 생각과 달리 아무도 없어서 따라 할 만한 존재가 없음에 두 번째로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동전도 들고 오지 않아 당황해서 여기저기 둘러보던 그녀는 겨우 기계를 찾아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고, 제일 큰 세탁기를 열고 위에 쓰여있는 설명대로 이불 커버와 카펫을 넣고 문을 닫고, 돈을 넣고 세탁기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처음 와보는 곳에서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혼자 뿌듯해하며 그녀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세탁기가 돌아가는 것을 넋 놓고 보다가, 가져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처음엔 이어폰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지만, 세탁기 소리에 금방 적응이 되어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뜻밖의 오후는 이쯤에서 잠잠한 일상으로 돌아간  같았는데, 그녀의 작은 고요는 빨래방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이 등장하면서 흔들렸다. 그녀는 책을 읽던 집중이 깨졌지만, 애써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처럼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시 한번 집에 두고  이어폰이 생각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빨래방에 당황하더니, 이제 혼자 있는 공간에 타인이 들어오자 불편해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대화할 필요는 없을 테니 그녀는 책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방금 들어온 남자도 부스럭거리며 커다란 비닐봉지에서 자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분주히 자기 일을 했고, 그렇게 어색하지만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세탁기만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어색하게 서로 흘끔 보고는 각자 시간을 보내던 그녀와 남자는 세탁기 종료 알림음에 결국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책을 덮고 일어나 세탁기 문을 벌컥 열었으나, 물을 잔뜩 먹은 카펫과 이불 커버는 근육이 한참 모자란 그녀의 상완과 어깨로는 수월하게 꺼낼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트를 가져다 놓고 낑낑대며 빨래를 꺼내야 하는  자리는  하필 남자가 앉은 의자 바로 앞이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던 남자는  상황을 보자 헤드폰을 목으로 내리더니 바로 일어나 손을 보탰다. 그녀는 민망해져서 감사 인사를 건넸지만, 남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남자는 마치 원래 알던 사람의 일을 돕는 것처럼, 카트를 끌고 그녀가 건조기 문을 열자  그녀의 빨래를 함께 건조기로 밀어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하자,  고개만 꾸벅이고 남자는 자리로 돌아가 헤드폰을 썼다.


훈훈한 도움 치고 너무도 조용한 남자 때문에 그녀는 한층 더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창가에 덮어둔 책을 집었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건조기는 신나게 털털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온으로 30분 코스를 돌렸으니, 30분 뒤면 이 어색함도 끝이었다. 남자는 헤드폰을 쓰고 다리를 꼬고 앉아 발을 까딱이며 핸드폰만 들여다볼 뿐, 이 어색함은 모두 그녀의 몫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한 페이지를 세 번째 다시 읽기를 시도하다가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이게 혹시 빨래방의 예의나 법칙 같은 것이라면 남자의 빨래도 함께 꺼내 주고 옮겨주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이 동시에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보다 시끄러워졌을 때, 남자의 세탁기가 종료 알림을 울려왔다. 남자가 세탁기를 열자 그녀가 얼른 그 옆으로 다가섰다. 남자가 깜짝 놀라 그녀를 잠시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세탁물을 꺼냈다. 그녀는 별 도움이 못되었다는 생각에 건조기 앞으로 다가가 도우려고 기다렸다. 헤드폰을 벗은 남자는 그녀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 껀 저한테 별로 무겁지 않아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제대로 대꾸도 못한 채 얼굴이 빨개진 채 벙쪄 있다가 뜬금없이 죄송하다는 말인지 고맙다는 말인지를 알 수 없게 얼버무리고는 남자를 지나 창가로 돌아갔다. 그녀를 따라 남자의 고개도 움직이고, 남자의 귀도 조금 붉어져 있었다. 여자는 다시 독서를 하기 위해 애를 썼고, 남자도 얼른 건조기를 돌리고는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서, 앉으려다가 느릿느릿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 저기.. 저도 그 책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도와드린 거였어요."

남자는 말을 하자마자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어 귀를 지나 목까지 빨개졌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뒤통수는 뭐라고 답하기 어려운 침묵에 빠졌다. 그녀의 건조기는 15분이 남아 있었다. 이미 대답할 타이밍은 지나갔고, 그는 엉거주춤 다시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썼다. 그녀는 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나더니 빨래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자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15분이 마저 흐르고, 그녀의 건조기가 종료되어 알람이 울릴 때까지 빨래방에는 남자 홀로 있었다. 그때 숨이 조금 찬 듯 호흡이 가빠 보이는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커다란 쿠키가 들려있었는데, 그녀는 성큼 남자 앞으로 다가와 쿠키를 내밀었다.

"그, 책에 얼굴만 한 쿠키 얘기, 있잖아요. 읽으면서 드시면, 좋을 것 같아서.."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멍하니 쿠키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카트를 끌고 건조기에서 뽀송해진 이불 커버와 카펫을 담고 빨래방 문을 열고 나서면서 여전히 멈춰 선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좋은 주말 되세요."

남자가 답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돌아와 원룸 문을 열었다. 어젯밤 자기 전과 똑같은 심란한 풍경이었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바닥에 카펫을 다시 깔고 말려둔 이불솜에 커버를 씌우는 동안에도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커피를 내린 뒤, 가방에서 커다란 쿠키를 꺼내 먹으며 그녀는 생각보다 오늘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 이불 빨래를 하러 토요일엔 빨래방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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