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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G Jun 23. 2020

남편의 비닐봉지, 00는 있고 00는 없다

가장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일까?

 옛날 일일 드라마엔 이런 장면이 꼭 있었다.


한 손엔 양복 재킷을 구깃하게 들고 넥타이는 반쯤 푼 채 걷고 있는 샐러리맨 아빠. 다른 손엔 추레하게 늘어진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족들은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린 봉지에 더 관심을 보인다. 아빠는 무심한 척 슬쩍 내려놓는다. 그 봉지를 열어보면 갓 튀긴 기름 냄새가 가득한 치킨 한 마리.


그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화목한 서민 가정의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씬은 화목한 가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아니라 중년 남자의 애잔함이 깃든 내용이었다.      


최근 남편도 퇴근길에 다양한 내용물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온다. 봉지 안을 들춰보면 어떤 때는 딸이 좋아하는 망고, 어떤 때는 내가 좋아하는 꽈배기, 어떤 때는 아들이 좋아하는 치킨 대부분 그런 종류의 소소한 간식들이다.  


‘와아~’하고 받아먹던 딸의 입장에서 이제 치킨 살을 발라주는 엄마로 입장 전환이 된 요즘.  이젠 보인다. 남편 손에 들린 봉지보다 그 봉지를 들고 온 남편의 어깨가.


그동안 남편이 사들고 온 내용물에만 집중했지 남편의 마음을 살핀 적이 없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것을 사 왔는지 물을 생각도 물을 이유도 찾지 못했다.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 죽음을 생각한다 '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움을 혼자 수행 중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회라는 외로운 전투장에 홀로 남겨진 남편을 생각했다. 그리고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고르는 중년 남자의 눈꺼풀을. 들었다 놨다 하는 동안 아이가 좋아할까? 아내가 좋아할까? 기대했을 그 마음을 한번 들여다본다.  


마흔 넘은 남자들에게 가정은 뭘까? 그 무게감은 어떤 걸까? 커가는 아들 딸, 살림하는 아내, 노쇠한 부모님, 모두 남편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단 생각이 든다. 대출금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앞으로 애들 학원비가 더 들어갈 텐데, 부모님은 이제 더 이상 일하기 힘드실 텐데, 그런 생각들이 늘 머릿속에 차 있는 듯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답도 없다. 마땅히 비빌 언덕도 없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싶은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처음엔 그랬다. 빠듯한 살림에 자꾸 뭘 사 오는 남편이 못마땅해 한마디 하기도 했다.       


"어휴, 이게 다 얼마야? 동네 마트 가면 포인트 라도 쌓지 “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이 사 온 걸 달갑지 않아 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몹시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쓸쓸한 눈으로 말했다      


"내가 이 정도 능력은 돼."       


그 말이 슬펐다. 무거운 무게를 견딜 어깨가 있다고 증명하듯, 나지막이 외치는 듯한 그 한마디. 고단한 하루 끝에 가족이 반김이 필요했을 텐데. 간식 봉지를 들이밀어서라도 환영을 받고 싶었던 것일 텐데.  


"아빠 최고야!"      

"아주 맛있어"     

"당신 덕분에 오늘 저녁 해결됐네"      


기뻐하는 가족들을 보며 다시 전투화 끈을 동여매는 거겠지.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턴 남편이 사 들고 오는 어떤 것에도 싫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과장되리만큼 좋아한다. 어찌 보면 ‘수고했다’, ‘고맙다’ 말보다 더 쉽고 편한 방법이다.    


곧 남편의 월급날이다. 이번엔 또 뭘 달랑달랑 들고 올까? 바가지를 썼든 입에 맞지 않는 것이든 아이들과 내가 할 역할은 정해져 있다.   "와아!! 아빠 최고다, 역시 내 남편!"이라는 존재의 반김.      


혹시, 퇴근길에 남편이 뭔가 사들고 온다면 호응해 주자. 가격이나, 가성비 따윈 잊어버리고 역시 당신뿐이라고 반겨주자. 여태 단 한 번도 자신이 좋아한 것을 사 들고 온 적 없는 사람이다.     


남편이 들고 온 비닐봉지 안에 가족은 있고,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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