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청춘들을 위하여
스터디를 주말로 옮겼다. 시간적으로도 여유 있고, 거리도 집이랑 훨씬 더 가까워졌는데 2주 연속 10분이나 지각했다. 스터디원들에게 너무 미안해지면서, 내가 학창 시절 왜 지각쟁이였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원래 목적지가 코 앞이면 더 지각하는 법...
스터디가 끝난 후 슬럼프가 왔다는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한다. 쿠크다스 같이 무너지는 그 심정을 잘 알기에 나는 누구보다 안타깝고 속상했다. 그러다 문득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청년들을 눈물짓게 만드는가 싶었다. 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가장 예쁠나이에 이렇게 울어야 하나.
나는 위로한답시고 친구에게 어쭙잖은 조언들을 폭격처럼 쏟아냈다. 더 많이 들어주고, 따뜻한 말을 건냈어도 됐을 뻔했는데. 조금 과했을까. 꼰대처럼 '기둥론'을 열심히 떠들어댔다. 하지만 힘들수록 '내면의 기둥을 세우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믿는다. 자기 안의 기둥이 단단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회복하기 어렵다. 이른바 '회복탄력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둥 세우기는 각자마다 방법이 다르다. 때문에 생채기가 나더라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기둥 재질을 비닐에서, 플라스틱에서, 강철로 바꿔나가야 한다. 나는 그게 책과 자전거 타기와 맥주 한 캔이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 같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의 무한반복. 오뚝이처럼 말이다. 적어도 오뚝이가 제 혼자 팽창해서 터져버리거나, 누군가 오뚝이를 망치로 깨부수지 않는 이상 오뚝이의 뒤뚱거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누구라도 인생이 족같이 느껴지는 시기는 찾아오는 것이다. 그게 태어나자마자 일수도 있고, 유년기 성장하면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서, 혹은 독립 후 사회에 뛰어들면서, 낯선이들을 대하면서 등등 여러가지의 면에서 이른바 '족타임'은 반드시, 그것도 '여러 번' 온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방법은 어떨까? 어차피 인생에서 거쳐야 할 '족타임'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거다. 대신 쿨하게. 언제든 금방 다시 우뚝 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무너지고 일어서고의 반복. 정신없이 뒤뚱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만족스러운 내 모습을 만나는 때도 오지 않을까? 그게 정말 순간이라고 할 지라도...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철학을 제시했다. 영원회귀란 "삶은 한 번 태어나서 살고 죽고, 그것이 다음 생에도, 또 그다음 생애에도 또다시 회귀된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살아온 삶을 다음 생에도 똑같이 살아야 하는데, 지금 그러고 있을땐가? 라고 묻는 거다.
니체 철학은 '받아들임'으로 귀결된다. 그는 현실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했다.
그래 18. 어차피 인생이란게 존나게 뒤뚱거려야하는 거면, 오뚝이가 숙명이라면 조금은 유쾌한 마음으로 흔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쉽진 않겠지만, 어쨌든 결말은 그야말로 '오뚝'이 일테니까.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돼 있을테니까.
힘내자 우리 청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