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좋은 것을 베풀자
오늘 퇴근을 3시 반에 했다. 이번 주가 조금은 힘든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건지. 분명 노동을 하러 가는 회사인데 이 회사만큼은 위로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이다.
최근, 이직을 시도했던 곳에서 몇 차례 최종 탈락을 맛봤다. 슬픔의 시간은 여전히 가혹하다. 그래도 회복탄력성이 비교적 빠른 편인건 나의 정신적 건강함 때문일까? 아니다. 어쩌면 익숙함에서 오는 받아들임일지도 모르겠다. 근 4년간 '귀하는 이번 00 전형에서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는 문자를 숱하게도 받았다. 물론 슬픈 일이다. 매번 여기까지만 해야지, 이제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또 공고가 뜨면 뭐에 홀린 듯이 지원하곤 했다.
원래 올해 계획은 워라밸 좋은 지금 회사를 다니면서, 글 쓰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최근에 한 달 프로젝트로 기획한 뉴스레터식 에세이도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늘 상상만 해오던 책 출간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그렇게 브런치와 블로그에 조금 더 공을 들여보자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또 중독자처럼 몇몇 관심 가던 회사에 지원했다.
중독자처럼 뜨면 지원을 했다. 서류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확실히 간절함이 덜 했던 게 사실이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그래서 따로 스터디를 하진 않았다. 그저 신문만 열심히 읽고, 필기 칠 기회가 주어지면 평상시 내 배경지식을 시험해보는 용도 정도로 치르고 오자고 가볍게 생각했다.
물론 그동안의 실력이 쌓인 것도 있겠지만 취준생으로 공부만 했던 때와, 회사를 다니면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합격률이 비슷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으로 웃기다. 가볍게 생각했던 게, 필기시험까지 통과해버리면 그때부턴 갑자기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간절해지기 시작한다.
앞서 서류와 필기까지에 있어 내가 '가벼운 태도'를 보인 건, 떨어질 것을 대비한 방어기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난 가볍게 넣었으니까. 뭐 떨어져도 괜찮아. 쿨하게. 하지만, 회사가 나를 고차 전형까지 턱턱 붙이기 시작하면 그 마음은 180도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 열심히 면접 준비를 하고 기대를 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최종 합격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어디로부터 거절당한다는 것은 역시 기분 좋진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픔의 깊이가 조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더 깊은데 탄력은 있다. 뭐랄까 정말 깊게 슬퍼한 대신, 엄청 탄력적이게 다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다. 이유는 뭘까?
지금의 나는, 정확히 2년 전과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탈락은 했지만 나는 지금 1. 회사를 다니고 있다. 2.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
아주 단순하지만 엄청난 위로다. 경제적인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을 채우는 위로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단단한 회복탄력성을 선물했다.
문득 '위로'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위로의 사전적 의미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이다.
하지만 꼭 따뜻한 말과 행동이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재작년의 슬픔 속에서 나는 지금 회사를 만나 위로를 받고 있고, 일단 회사를 다닌다는 그 안정감으로 연애도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만난 K는 이성적이지만 따뜻한 사람으로 존재 그 자체만으로 힘이 되어주고 있다.
여기에 환경적인 위로도 뒷받침이다. 그래도 몸 건강하고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는 부모님이 곁에 존재한다는 건, 사실 얼마나 큰 위로이자 복받은 일인지 모른다. 인지하지 않아서, 아니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아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한 영상을 클릭했다. 대치동 윤리과목 1타 강사인 이지영 씨다. 그는 말 그대로 흙수저 자수성가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하루 3시간 자고 피 터지게 공부해서 나처럼 성공해!라고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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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년 전 건강악화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는자신의 지난 메시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먼저라고. 공부를 하는 것도, 내가 나를 사랑해서 더 좋은 것을 베풀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더 사랑하기로 했다.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을 받아들이고 내가 나에게 더 좋은 것을 베풀 수 있는 무언가를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일 중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베풀자. 완벽한 결론은 없지만 나는 한 겹의 위로를 더 덮어주기로 했다. 오늘의 나에게.